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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실 수 있음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은혜와 공로의 경계를 허무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고백하는 진리가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오직 은혜(Sola Gratia)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전적인 은혜라면, 인간의 책임적 행동과 참여는 애초에 설 자리가 없는 것인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인간이 참여한다면, 그것은 이미 오직 은혜이기를 그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은혜와 공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행동 사이의 경계가 어느 순간 모호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 경계가 흐려지는 자리를, 다름 아닌 기도가 응답되는 원리에서 목격한다.
예수님의 모순되어 보이는 말씀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다소 모순되어 보이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우리는 이 말씀을 그저 “열심히 기도하라”는 권면 정도로 읽는다. 그러나 문맥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것은 분명한 조건문이다. 구해야 주시고, 두드려야 열리며, 찾으려 열망할 때에 찾아낼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같은 예수님이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눅 12:6~7). 하나님은 우리 머리털 개수까지 아실 만큼 우리를 낱낱이 살피고 돌보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다 아실 텐데, 왜 굳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시는가.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아시면서도, 구해야 주시겠다고 하신다. 이 모순 속에 기도의 비밀이 숨어 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드러나 있다.
다니엘의 이상한 기도 다니엘 9장은 이 비밀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낱낱이 자복하며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그 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실제로 역사가 일어났다.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간구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내게 이르러... 말하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단 9:20~22).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전한다.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단 9:23). 이스라엘의 칠십 년 포로기가 끝나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시겠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 예언은 다니엘이 지금 처음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말씀이었다. 다니엘은 몇 달 전에 이 예언서를 읽고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단 9:2)는 것을 알았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이 순간 그저 감사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뜻밖의 행동을 한다.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한 것이다(단 9:3). 이미 이루어지기로 예정된 일인데, 왜 굳이 기도하는가.
더 이상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다니엘이 백성의 죄를 끌어안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을 보시고, 비로소 칠십 년 포로기의 종결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이 말해주는 결론은 하나다.
하나님은 기다리셨다! 누군가 당신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기도하기를 기다리셨다. 이미 약속하신 일이라 해도, 그 약속이 기계적으로 성취되도록 두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기도가 당신의 은혜와 합해져서 역사가 일어나게 하신 것이다.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그분은 얼마든지 혼자서 일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다. 돌을 들어서도 말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사람 없다고 일을 못 이루시겠는가. 그러나 그분은 결코 혼자 일하지 않으신다. 모든 일에 당신의 백성을 참여시켜, 그 일이 당신 백성과 함께 이루어지는 사건이 되게 하신다. 혼자 하시면 그분은 우리 인간에게 더 큰 감사와 존경을 받으실 수도 있다. “주님이 전적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내가 너와 함께 그 일을 이루기 원한다”고 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로 초대하신다. 마치, 우리 인간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칠십 년 후에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은, 기계적인 시간의 경과로 성취되지 않는다.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자의 기도가 올라오기를 기다리셨다가, 그 기도를 보시고 비로소 “이제 되었다” 하고 일을 진행하신다. 만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마치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는 분처럼, 한없이 그 사람을 기다리셨을 것이다. 그 어떤 한 사람의 참여가 하나님께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모세와 히스기야가 보여주는 것 여기서 질문을 던져본다. 하나님은 한 연약한 사람의 기도 때문에 이미 정하신 뜻을 바꾸시는가. 성경은 그렇다고 답한다. 모세가 가로막아 서자,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진멸하시려던 뜻을 거두셨다(출 32:9~14). 히스기야가 벽을 향해 눈물로 통곡하자, 죽음을 작정하셨던 뜻을 거두시고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왕하 20:1~6).
뜻을 돌이키셨다 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연약함일까.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연약한 인간에게 기꺼이 마음을 여시고, 때로 당신의 뜻마저 돌이키시는 인격적인 분이심을 보여준다.
은혜와 공로 사이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가로막아 서는 자를 오히려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에스겔서는 정반대의 장면으로 이를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하나님은 “성 무너진 데를 막으며...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그중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였고”, 그렇게 가로막아 설 사람을 끝내 찾지 못하셨기에 진노를 쏟아 백성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탄식하신다(겔 22:30~31). 주님의 이 탄식을 알아차린 자라면,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아 서서 그분의 진노를 돌이켰던 모세는 감히 그것을 자신의 공로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기도해서 하나님을 움직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이미 누군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아 서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이 부족한 존재가 기도하게 된 것 자체가 은혜요, 그 기도를 들으신 것 자체가 또한 은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간의 참여를 기다리시는가. 성경은 답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전 3:9).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 왜 굳이 인간과 함께, 같이 이루고자 하시는가. 그것은 참여한 자의 존재를 높이시고, 그에게 상 주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한 탁월한 정원사가 있었다고 하자. 그는 혼자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나를 도와다오. 이 정원을 이루는 데는 네 손길이 필요하다.” 아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기 도움 없이는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아버지를 도왔다.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완성되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 정경을 함께 바라보며 말했다. “보아라, 네 도움이 없었다면 이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의 존재는 한없이 고양되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넉넉한 상을 더하셨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바로 여기서 은혜와 공로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칼뱅이 <이중은혜>에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분리하지 않은 것과 같다. 인간의 공로 가운데 은혜 아닌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결국 은혜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정원 앞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네가 나를 좀 도와다오.” 이 부르심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 마치 우리 없이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최선을 다해 참여하는 것뿐이다. 훗날 그 정원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그 능력도, 그 은혜도, 심지어 참여하고자 했던 그 마음까지도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었음을.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실을 우리 앞에 들이대며 우리의 수고를 지우지 않으신다. 오히려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네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말씀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진짜 동역자로 세워주신다. 이것이 은혜가 일하는 방식이다. 은혜는 인간의 참여를 지우지 않고, 도리어 그 참여를 통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