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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신앙관에 대해 말한다 (2) 에큐메니컬 복음주의 이야기 ⑥
우리는 앞에서 에큐메니컬 복음주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근본주의 신앙의 성경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는 근본주의 신앙관이 기독교 교리에 접근하는 기본성향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2) 기독교 교리에 대한 단선적 접근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근본주의는 사회의 세속화와 근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신앙의 근본적 진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분명 건강하고 바람직한 의도였다. 하지만 어떤 주장이든 근본적인 것을 수호하고자 할 때 유의할 부분이 있다. 근본 (fundamentals)에 대한 충성이 자칫 기독교 진리가 가진 통합성과 총체성을 상실한 채 편협하고단선적인 일방성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근본주의 신앙관은 기독교 교리와 사회문제를 다룸에 이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편협한 접근에 대해서는 이미 축자영감설에 입각한 기계적 영감설에서 예견된 바 있다. 이번 지면에서는 이를 교리적으로 좀 더 확장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➊ 그리스도 사건 (Christ event)에 대한 이해 먼저 근본주의는 그리스도 사건을 다룸에서도 총체성과 통합성을 상실하고 단선적 편협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성육에서부터 생애, 고난, 부활, 승천에 이르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가지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 십자가 사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이 그리스도 사건의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주의는 십자가 사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갖는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구원론적 의미를 놓치기 쉽다. 이 단편적 성향은 그리스도의 속성을 해석하는데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참 하나님(vere Deus)이요 참 인간(vere Homo)이시다. 이는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리 없이, 분열 없이’ 그리스도 안에 통합되어 있다는 교리를 확정하였다. 그 후 2천 년간 기독교는 이 고백을 기독론의 정통 신앙으로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근본주의는 세속주의에 맞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옹호하려다 보니 안타깝게도 그분이 가진 인간성(humanity)을 약화시키거나 부정해 버렸다. 이는 명백히 정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초대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가현설(Docetism)1)의 구조를 암묵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예수의 공생애에서 드러난 인간성과 여기서 비롯되는 여러 정서를 간과하거나 가볍게 여긴다. 그분이 우리 인간과 함께 웃으시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통을 보고 우시고, 겟세마네에서 고뇌하시고, 죄악의 권세에 분노하시고, 바리새인에 대해 화를 내신 정서를 충분히 수용 하지 않고 서둘러 넘어간다. 이는 근본주의가 동정녀 탄생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마치 예수가 일반적인 인간의 조건을 벗어난 특별한 존재임을 증명하려고 하다가 생긴 오류이다. 인성을 약화시키는 신학적·목회적 폐해는 심각하다. 첫째, 무엇보다도 중보자 예수의 실제성이 약화된다. 예수가 진정으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면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분의 중보가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에게 실제적인 것이 된다(히 4:15). 반면에 근본주의는 성도들이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는 알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여 함께 고난의 안개를 걸어가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는데 걸림을 주게 된다. 둘째, 구원론이 단편화된다. 예수의 인성이 부정되거나 약화되면 예수의 십자가 사역 안에 있는 연약한 심령의 치유와 회복, 마귀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라는 통합적이고 통전적인 구원의 스펙트럼이 부정되고, 오직 죄의 형벌대속설에만 집착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살펴보겠다. 셋째, 예수님의 삶을 통해 인간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동기를 부여받지 못하고, 예수는 신이기에 우리가 그 삶을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초월적인 분으로만 이해된다. 넷째, 예수의 인성에 주목하지 못하게 된 신앙은 인간의 구체적 삶과 고통, 사회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가 만든 죄와 악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잃게 만들어 신앙이 초현실적 신비주의로 흐르게 만들 수 있다. 이렇듯 성도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온전히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신학적 균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육신 신앙의 핵심이며, 중보자 예수의 실제성의 근거이며, 성도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목회적 토대이다. 근본주의는 이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➋ 속죄론에 대한 이해 근본주의가 교리를 대하는 일방성과 편협성은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교리사에서는 이를 속죄론이라고 한다. 2천 년 기독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이해를 허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교리학 특히 구원론에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 에 대한 해석은 실로 다양하다.2) 정통으로 인정받는 모델만 해도 형벌대속설, 이레니우스의 승리자 그리스도설과 속량설, 안셀름의 만족설, 아벨라르의 모범설과 치유와 회복설 등 실로 다양하다. 물론 이 모든 모델은 성경적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론에 있어 이 모델들 모두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으며”(요 10:10),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성장해 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다. 그런데 근본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 즉 속죄론에서 형벌대속설에만 집착한다. 그래서 다른 속죄론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거의 폐기하도록 만들었다. 형벌대속설이란 우리인간이 죄로 인해 받아야 하는 벌을 예수께서 대신 받으셔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면에서 속죄론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다. 지극히 맞는 진리이며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신앙고백도 이 형벌대속설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 가진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마귀에게 포획되어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되찾아 오신 속량(ransom)사건이요(속량설), 예수께서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꺾고 승리하신 사건이며 (승리자 그리스도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감화를 끼쳐 그 사랑을 본받게 하는 것이고(도덕적 감화설), 죄와 악에 찢기고 상한 인간의 심령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된다(치유와 회복설). 이 모든 것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한 사람을 건강하게 세워가며 사회에서 죄와 악과 원수의 권세에 맞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게 한다. 또 죄의 용서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 내면에 남아있는 온갖 심리적, 영적 질병을 극복함으로써 전인(全人)으로 세워가게 해준다. 그만큼 기독교의 위대한 구원론은 통합적, 통전적, 총체적, 역동적, 다층면적이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앙관은 유독 형벌대속설에만 집착한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근본주의는 유독 하나님의 심판을 피한 죄의 법적 용서에 만족하며, 반복해서 짓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을 신앙의 초점으로 삼는다. 나아가 죽은 후천국에 가는 것이 영생이라고 구원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물론 성경은 죄의 용서를 십자가 사건의 중요한 목적으로 선포하지만 동시에 여기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이레니우스가 말했듯이 구원은 한 그리스도인의 총괄갱신(total recapitulation)을 통한 인생과 존재 전체의 재창조 과정이며 창조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위대한 구원은 개인적으로는 영육혼의 전인적(全人的) 구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와 역사, 나아가 피조세계 전체의 구원이라는 광대하고도 심오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은 이 위대한 구원을 개인의 구원 그것도 죄의 용서에 국한하여 이해함으로써 구원의 심오하고도 광대한 스펙트럼을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오묘하고 광대하며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할 수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엡 3:19). 물론 의도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무서운 것이다. 자연히 근본주의 신앙은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신실하게 추구하고 확장하는 일에 전념하기보다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 외의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인간은 열망(desire)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열망이 채워지면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열망을 찾아나간다. 근본주의의 얄팍하고 단편적인 신앙 이해는 죄의 용서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느끼자마자 새로운 열망을 찾아나간다. 더욱 심원하고 치열한 영육혼의 전인적 구원에 목말라하지도 않고, 타락한 사회와 역사전체를 회복하시려 자신을 불렀다는 거룩한 역사의식도 없고, 피조세계 전체의 탄식(롬 8:19 ~ 23)에 귀 기울이는 하나님 자녀의 부르심에 대한 자각도 결여되어 있다. 근본주의 신앙관의 영성적 뼈대가 그만큼 얄팍하기 때문이다!
1) 예 수가 인간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었다고 믿는 초대교회의 이단이다. 2) 물 론 여기서 다양하다는 말은 다원주의(pluralism)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인간의 구원에 대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성경이 다양한 해석을 허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성경은 풍성한 속죄론을 품고 있다.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이를 또다시 다원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교리사에서 구원론의 변천과 현대조직신학의 구원론에 대한 무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