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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본주의 신앙관에 대해 말한다 (1)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6-05-06 오후 7:52:40
조회 102

근본주의 신앙관에 대해 말한다 (1)

여태까지 우리 새문안교회의 신앙관이요 새문안교회가 속해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신학인 에큐메니컬 복음주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 성경관을 먼저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성경관인 기계적 축자영감설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 교단의 성경관이요 정통 성경관인 유기적 영감설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사실 기계적 축자영감설이 이렇게 널리 확산된 것은 이 성경관을 전제로 한 잘못된 신앙현상이 한국 교회 안에 팽배해 있으면서 교회의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건강한 확산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근본주의 신앙관이다. 향후 몇 차례에 걸쳐 이 근본주의 신앙현상에 대해 살펴보면서, 바르고 건강한 에큐메니컬 복음주의 신앙의 지평을 명료히 하고자 한다.

들어가며

근본주의는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이 세속화되고 자유주의 신학이 범람하여 교회를 잠식하는 데서 위기를 느껴 시작되었다. 즉 근본주의 신앙은 사회가 근대화, 세속화되어 가면서 나타난 경향에 대한 왜곡된 반작용으로 시작된 것이다. 원래는 기독교의 본질적인(fundamental) 가치를 지키자는 좋은 취지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반지성적인 사조와 특정 정치운동과 연결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여 다양한 변모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그 폐해는 결코 적지 않다.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히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해 가는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엄히 경계해야 하는 두 가지 큰 사조가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요, 다른 하나는 이 근본주의 신앙이다. 전자는 세속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과학주의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무분별하게 신앙에 도입하여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뒤흔들어놓는 반면, 후자는 세속화라는 충격적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교회와 신앙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이 왜곡·변질되어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분리, 고립시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일에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이슈를 등에 업고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교회의 정통 신앙을 훼손하고 공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후퇴시켰다. 그뿐 아니라 분리주의적 전투적 성향으로 인해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약화시켜서 선교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등 그 폐해가 심각하다.

문제는 이 근본주의가 개신교 신앙의 핵심 사조라 할 수 있는 복음주의의 옷을 입고 있기에 그 실체 파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좇으며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성도들 가운데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근본주의 신앙에 젖어서 생명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의 삶을 본의 아니게 따라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이 근본주의는 반공주의나 반동성애 등 대중의 이목을 선점하는 이슈의 한복판에서 문화전쟁(cultural war)을 주도하면서,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해 가고 있다. 실제로 이로 인한 폐해는 만만치 않다.

근본주의 신앙의 가치

이 근본주의 신앙은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가진다. 첫째, 앞에서 살펴본 성경의 기계적 축자영감설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살펴본다. 둘째, 근본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거나 약화시켜서 받아들이려 한다. 주후 4세기 세계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누스 신조를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참하나님(vere Deus)이시오, 참인간(vere homo)으로 오셨다고 확정했다. 이는 정통교회의 핵심 신앙고백이다.2)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약화시키거나 깨면 안된다.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본주의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셋째, 십자가 사건이 가진 폭넓고 심원한 다측면적 구속사 이해를 부정하고 대속적 죽음만이 유일한 의미라 주장한다. 넷째, 호전적·전투적 영성으로 이 신앙을 갖고 있는 흐름에서는 끊임없이 갈등, 대립, 분열과 분리가 일어난다.

이 근본주의는 교리적으로 2천 년의 정통 기독교 신앙과 분리되어 있다. 개신교인들이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기독교가 마치 1517년에 시작된 것처럼 알고 있는 것이다. 즉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교수로 섬겼던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95개 조의 반박문을 써 붙인 날을 기독교의 원년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1500년간 기독교는 죽어 있다가 1517년에 부활한 것처럼 인식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신조나 교리가 태어난 날을 기독교의 원년으로 간주한다.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요 섭리하고 구원하시는 구속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소치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시작된 이래 교회의 역사는 지난 2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부상과 침강, 부흥과 쇠락, 타락과 회복과 갱신을 반복해 왔지만 기독교회는 지난 2천 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서서히 확장되었다. 그렇기에 정통 기독교는 지난 2천 년간 신앙의 유산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오늘의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이 모든 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내가 속해 있는 교파나 교단과 다른 교리를 가졌다 할지라도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주님으로 믿으며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포용한다. 비판적 대화를 이어가며 연합과 일치를 추구해 간다. 현실역사 속에서 구속사를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1) 근본주의의 성경관

근본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관이다. 근본주의는 기계적 축자영감설을 옹호한다. 기계적(mechanical)이라 함은 성경 66권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성령 하나님이 기록자에게 직접 받아쓰게 하셔서 기록된 것이라는 뜻이요, 축자영감적이라 함은 한 글자 한 글자에 성령의 영감이 들어가 있기에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적·역사적으로도 진리성에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이 진리성은 과학, 철학, 사회과학 등 모든 범주를 포괄한 것이라 믿는다. 기계적 축자영감설은 정통신앙의 신앙관과 거리가 멀다. 건강한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저자들이 근본주의가 말하듯이 기계처럼 성령께 받아 적어 기록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성령께서 특정한 시대적 맥락(context)에서 저자의 영성, 인격, 하나님 경험, 신학사상을 사용하셔서 기록한 것이라 본다. 성경은 스스로 기계적영감설을 부정한다. 일례로 행 1:1에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저자 누가가 말한 ‘내가 먼저 쓴 글’은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을 말한다. 그는 누가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 적은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실제로는 성령께로부터 받아 적은 것인데 ‘내가 쓴 글’이라고 기록했다면 이는 대필자에 불과한 사람이 저자라고 주장하는 격이 된다. 역사가 누가는 복음서를 예수의 행적을 추적하여 자료를 모아기록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성령의 영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기록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계적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받아 적은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저자들의 인격과 경험 그들의 시대적 맥락을 활용하신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성경 66권이 가진 다양한 스펙트럼과 그 풍성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행적이 네 개의 복음에 기록되었기에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이 다양하고 풍성하게 이해될 수 있다.

성경은 스스로가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에 입각한 진리성을 부정한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반대이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면서 한 글자도 과학적·역사적 진리성에서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성경의 진리성을 방어하기가 어려워진다. 성경에는 과학적, 역사적으로 팩트(fact)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들이 왕왕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서의 향유 옥합을 부은 사건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한 여인이 옥합을 깨어 머리에 부었다고 서술한다 (마 26:7, 막 14:3). 반면에 누가는 발을 씻었다고 서술한다 (눅 7:38). 어떻게 한 사건에 대해 엇갈린 증언이 있을 수 있는가. 과학적 실증적 진리로 판명하려고 하면 둘 중 하나는 틀린 진술이 된다. 또한 잠언 6:6~8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현대 동물학에 의하면 개미는 벌과 함께 인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조직화 된 사회를 갖고 있다고 한다. 여왕개미, 일개미, 병정개미 등 다양한 사회 조직을 가지고 있다. 또 레 11:20~23에 보면, “곤충이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곤충은 다리가 여섯 개다. 이는 창세기에서도 반복된다. 창 1장에 보면 해와 달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고 (창 1:14~19), 식물은 셋째 날에 창조되었다 (창 1:11~13). 식물이 광합성을 하기 위해 햇빛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창조주가 세우신 자연이치이다. 그렇다면 식물보다 해가 나중에 창조되었다는 성경구절은 이 창조주가 주신 이치에 어긋난다. 이렇듯 과학적 잣대로 보면 성경은 구석구석에서 과학적으로 오류가 발견된다. 성경의 한 글자도 과학적·사실적으로 틀린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의 주장은 상식과 건전한 이성을 가진 현대인들에겐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성경의 진리성을 방어하려다 오히려 현대인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의 책으로 받아들이는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어 버린다. 근본주의 신앙의 기계적 축자영감설은 이렇듯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 변증에도 실패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선교에서도 걸림이 되는 치명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스스로 축자영감설이 아닌 유기적 영감설을 주장한다. 성경은 신앙과 구원에 이르는 행위에 절대 오류가 없다는 말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은 말씀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글자의 오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학적 실증적 진리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신앙과 거룩한 행위로 살아감에 오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의 성경관은 이를 부정한다. 결과적으로 자기 확신에 입각해 성경의 진리를 옹호하려다 오히려 성경을 진리로 변증하고 방어하는 데 철저히 실패해 버리는 오류를 낳았다. 선교에 걸림이 되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어 가는데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원화된 세속화 시대의 한복판에서 교회와 성도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며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복음화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선교의 대사명을 위해 교회는 항상 무엇을 목숨 걸고 지킬 것이며, 비판적 대화와 만남을 통해 무엇을 유연하게 개방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지고 가야 할 거룩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근본주의 신앙의 성경관은 그 의도의 순전함에도 불구하고 지성적, 영성적, 선교적으로 안이하고 나태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 다음 호에 계속 -


1) 하나님 중심 신앙을 거부하는 공산주의나 반성서적 가치를 주장하는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를 다루는 교회의 태도는 대단히 전략적이고 또한 지혜로워야 한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는 선교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심원한 영적 통찰과 함께 상인의 현실적 감각을 같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2)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이를 확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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