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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큐메니컬 복음주의 이야기 ②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5-12-10 오전 9:26:36
조회 48

에큐메니컬,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 됨

아프리카의 외딴 지역 한 곳에 선교사 한 사람이 들어갔다. 복음 전하는 일을 기대하며 찾은 땅이었지만, 막상 그곳의 현실은 복음 전파 이전에 해결해야 할 고통으로 가득했다. 제대로 된 의료 시스템이 없어 병으로 쓰러지는 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은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더 나은 식사 한 끼를 얻기 위해 어린 소녀가 몸을 팔고 해맑게 웃는 현실 앞에서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본국에 이곳의 혹독한 현실을 알리는 한편, 교회를 세우는 것 외에도 작은 의료·교육 사역을 함께 시작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 사역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한 교단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이 지역에 함께 들어와 있는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이 땅의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시작한다.

하지만 같이 사역을 진행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꾸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곧 갈등의 원인이 ‘다른 교단의 신학에 대한 무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서로의 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기적인 신학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자기 교단의 신학을 알려주고 상대의 신학을 이해해 갔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신학 학문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와 함께 신기하게도 갈등은 점점 사라지고, ‘주님을 위해 함께 헌신한다’는 깊은 연대감이 자리 잡았다. 결국 이 연합은 이 나라 전체를 변화시키는 생명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보여준 에큐메니컬 신앙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에큐메니컬은 사람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왜곡하여 이해되고 있다. 에큐메니컬 하면 W.C.C.를 연상하거나 다원주의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컬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교가 진행되는 그 현장에서 시작되었다. 선교의 최전선에서 무너져가는 생명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시작된 연대였다. 그리고 그 연대의 목적은 분명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바로 이 생명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한 연합이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연합한 이유는 ‘교회 일치’라는 목표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조선 땅의 현실이 너무 절박했기에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이 백성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서라면 교단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 자체도 귀하게 여기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사…”(요 17:21).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은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기질, 문화, 신학적 관점, 이념이 다르다고 갈등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서로 다름을 ‘하나의 풍성함’으로 받아들이며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이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보여준 길이다.

새문안교회는 지난 138년간 이러한 두 흐름을 함께 품어왔다. 합리적 보수와 건강한 진보,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이 공존해 왔다. 언더우드가 이 땅을 사랑한 정신 속에서 도산 안창호, 우사 김규식, 외솔 최현배 같은 민족의 선각자들이 태어났다. 신학적으로도 필자에 앞서 목회를 하셨던 여섯 분의 목사님들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와 에큐메니컬 신앙을 넘나들었다. 산업화 시대의 복음주의적 헌신과 민주화 과정에서의 에큐메니컬 실천도 공존했다. 이런 전통 속에서 새문안교회는 분명한 정체성을 지녔다. 바로 ‘에큐메니컬 복음주의’이다.

하지만 새문안교회를 비롯한 오늘의 한국 교회 현실은 이 전통에서 멀어지고 있다. 사회에는 혐오, 배제, 차별, 증오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회가 서 있다는 뼈아픈 지적도 있다. 조금만 달라도 적대시하고 정치적 차이를 신앙의 적으로 삼는 모습은 예수님의 정신과도, 한국 교회의 소중한 전통과도 멀다.

초대교회 거장 어거스틴은 말했다. “본질에는 일치, 비본질에는 관용, 모든 일에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본질에서는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 밖의 비본질적인 것들은 포용해야 한다. 사랑이 혐오를 이겨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사명은 분명하다. 기후 위기, 세계 선교, AI 윤리와 같은 거대 담론들은 어떤 교단도 홀로 감당할 수 없다. 연합하고 협력해야만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한국 교회에서 에큐메니컬은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로부터 이어져 온 한국 교회의 정통적 선교 유산이다. 이 아름다운 전통을 회복해 분열과 혐오의 어둠을 끊고, 예수께서 오신 목적인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길”(요 10:10)에 다시 서기를 소망한다. 한국 교회가 작지만 단단한 차이를 넘어, 연합과 하나 됨으로 이 땅에 생명 사역을 이루어가는 참된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컬의 길을 걷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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