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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소개

언더우드를 찾아서
Since September 27, 1887

새문안교회와 언더우드 목사



새문안교회 창설자, 호러스 그랜트 언드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元杜尤(원두우))는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존(John)언더우드와 엘리자베스 그랜트 메리(Elizanbeth Grant Mair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존은 발명가였고 사업가였다. 등사용 잉크, 타자기 잉크리본 등을 명했고 직접 공장을 운영했다.



어린시절의 가정환경과 성장기의 신앙적 배경



호러스는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사업으로 바빴지만 주일 오후시간만큼은 아이들과 함께 교회학교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가정에 불행이 닥쳐왔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그리고 할머니가 한 해에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안 가 아버지의 사업까지 동업자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따라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왔고, 이에 그의 아버지는 신대륙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호러스의 나이 열 살, 즉 1869년 그는 두 살 위의 형 프레더릭 윌즈(Fredrick Wills)와 함께 프랑스 볼로뉴에 있는 소년 학교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였으나, 그들 형제는 그 안에서 개신교 신앙을 그대로 실천했고 그 점에 있어서는 방해받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2년동안 배운 후, 그는 미국으로 이민가는 가족들과 합류하였다. 뉴저지에 있는 뉴더햄에 정착한 후 아버지는 다시 잉크공장을 차렸고, 점차 자리가 잡혀갔다. 뉴더햄에는 네델란드 개혁교회 교인들이 많았다. 언더우드 가족도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가운데 1874년 12월 전 가족이 개혁교회에 등록하였다. 따라서 언더우드 가문의 교파가 회중교회에서 개혁교회로 바뀐 것이다.
그의 가족은 그로브 교회에 다녔는데 그 교회목사인 메이븐(Maben) 박사는 호러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잉크공장 일에 매달렸으나 호러스는 학교에 다니는 특혜를 받았다. 즉 그는 저지시티에 있는 해스부르크 소년학원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메이븐 박사에게서 대학 입시를 위한 특별교수를 받아 1877년에 뉴욕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뉴더햄에서부터 뉴욕까지 7마일을 걸어서 통학했고 밤 자정까지 공부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근면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1881년 아버지가 별세함으로써 또 한번 큰 슬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근면과 성실함으로 자식들에게 본을 보였고 "경이로운 신앙과 열심을 가졌던 기독교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신앙과 유산은 호러스에게 전수되었다. 즉 그해에 뉴브런즈위크 (New Brunswick)에 있는 네델란드 개혁신학교(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목회자로서, 나아가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언더우드 한국에 들어온 계기



그러면 언더우드는 어떠한 계기와 경위로 한국의 첫 선교사로서 내한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가 선교사 꿈을 갖기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그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인도 사람의 강연을 듣고 인도 선교사로 갈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학, 신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 졌으며 처음 그가 가려고 했던 선교지는 인도였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동안에도 선교사로서의 훈련에 목표를 두고 향후 선교 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 1년여 의학을 별도로 배우는 등 나름대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신학교 재학중에 뉴브런위크에 처음으로 구세군이 들어왔는데 낯선 그들의 전도방법이 개혁교회 풍토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언더우드는 흥미를 갖고 그들의 전도를 지켜 보았으며 어떤 때는 자신도 그들 속에 들어가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 일기 시작한 선교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가 본래 선교지로 인도를 택했다가 한국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882년 말에서 1883년 초에 이르는 겨울, 뉴브런즈위크신학교 학생 가운데 선교사를 자원한 학생들의 모임이 하나의 발단이 되었다. 이 모임의 한 회원이었던 울트만스(Altmans)가 한국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은둔국이었던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1,200~1,300만 되는 인구에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앞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미국교회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며, 누군가 갈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1909년 언더우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당연히 인도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확신했기에 인도에 가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으며 1년간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따라서 어떤 다른 인물이 그곳(한국-필자주)에 가도록 마련되어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갔는데 1년이 지나도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고 어떤 교회도 그곳에 보내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해외 선교에 있어 지도급 인사들조차 한국에 나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글을 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한 메시지가 나를 깨우쳤다. "왜 너 자신이 가지않느냐?" 그러나 인도 선교를 특별한 소명으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몇몇 특별한 준비를 한 것 등이 떠올라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던 그가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한 것은 꼭 1년간의 고민 끝이었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는 일도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가 소속된 개혁교회 본부에 2차에 걸쳐 한국 선교 청원서를 냈으나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으며, 이어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도 같은 요청을 두 번씩 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결국 그는 미국에서 목회자로 일하거나 인도 선교사로 가는 것 중에 한 길을 선택해야겠다는 본래의 계획대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뉴욕에 있는 한 개혁교회에서 1년에 1,500달러 조건으로 그를 청빙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의 꿈이 좌절된 상태에서 이같은 청빙을 받자 이에 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드는 또다시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나는 그런 방향으로 마음을 굳히고 뉴욕교회에 청빙 수락 편지를 써서 봉토에 넣어 막 우체통에 집어 넣으려는 순간,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싶었다. "한국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한국은 어떻게 될까?"나는 편지를 도로 집어넣고 한국에 가기로 다시 한번 결심한 후 센터스트리트 23번지(옛 장로회 선교본부 건물)로 방향을 돌렸다.


언더우드가 다시 마음을 정하고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갔을 때엔 총무가 바뀌어 있었다. 훗날 한국 선교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엘린우드(F.F. Elinwood) 박사가 총무로 부임하여 그를 맞이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미 엘린우드 앞에는 브루클린의 평신도 맥윌리엄스가 한국선교에 써달라고 보낸 1,250달러가 헌금되어 있었다. 이로써 언더우드가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는 한국 선교는 현실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1884년 7월 28일, 선교부가 상해에 있는 알렌에게 한국 파송을 허락한다는 전보를 친 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 해 여름에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받은 것이다. 한국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그 해 여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의 친척들 가운데 에드워드 존스(Edward Jones)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런던선교회 임원이었다. 그를 통해 한국이 어떤 곳인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특히 1866년의 토마스 목사 순교사건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1884년 11월에 언더우드는 네덜란드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계통 뉴브런즈위크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12월 16일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여행용 가방 하나, 타자기 한 대, 대형 카메라 하나가 그의 짐 모두였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약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주로 헵번(J.C. Hepburn) 선교사 사택에 머물면서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Henry Loomis)에게서 최근 한국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도 만났다. 주로 헵번(J.C. Hepburn) 선교사 사택에 머물면서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Henry Loomis)에게서 최근 한국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도 만났다. 특히 이수정은 그의 한국어 어학선생 노릇까지 하였다.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도 만났다. 한편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 福德)로부터 한국의 정치상황이 정변으로 평온치 못하므로 입국을 연기하라는 개인적인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귀중한 동지를 만났으니 그는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갖고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였다. 이 둘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란 칭호를 함께 받으며 둘 사이의 돈독한 우정관계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신학교 졸업당시의 언더우드 목사
신학교 졸업당시의 언더우드 목사

언더우드 목사가 그린 지형도
언더우드 목사가 그린 지형도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1887.9.30.)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1887.9.30.)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1887.9.30.)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1887.9.30.)

두 H.G.의 우정-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이 두 사람은 하나는 장로교 선교사, 하나는 감리교 선교사로 서로 소속은 달랐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선교사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위대한 H.G.들"이란 칭호를 받았다. 둘의 이름(First and Second name) 머리글자(Initial)가 모두 'H.G.'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둘은 모두 열정적이면서 복음적인 목회자였다. 이들은 모두 한국 선교에 자기 생을 바쳤고 선교활동은 2세에게까지 연결되었다. 둘의 선교활동은 장로교·감리교 양 교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펜젤러는 1858년생이다. 언더우드보다 한 살 위인 셈이다. 독일·스위스계로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했다. 본래 개혁교회 교인이었으나 18세 때 중생(重生)을 체험한 후 3년 뒤에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프랭클린마샬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선교사 훈련을 받았으며 1882년에 드루신학교에 입학하면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83년 가을 하트포드에서 전 미국 신학생 수양회가 열렸는데 이때 언더우드와 함께 아펜젤러도 자신의 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이 모임은 해외선교자원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만나거나 친교를 맺은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한국 개척 선교사가 될 신학생 후보는 하트포드에서 처음 함께한 셈이다.
언더우드와 마찬가지로 아펜젤러 역시 첫 선교 대상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던 동창생 워즈워드(J.S. Wadsworth)가 개인 사정으로 한국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아펜젤러가 대신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1884년 9월 그는 미국북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 리드(J.M. Reid)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갈 것을 요청받았다. 고민 끝에 그는 한국을 택하였고 그 해 12월 20일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결혼한 지 3일 만이며 미국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의사인 스크랜턴(W.B. Scrnat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목사 안수를 준 지 16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펜젤러는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인과 함께 일본에 도착하여 1개월여 머물면서 매클레이를 비롯한 일본 주재 선교사들과 한국인 망명객들을 만나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등 언더우드와 같은 체험을 하였다.



언더우드 한국에 들어오다



이처럼 별개의 선교본부에 의해 한국에 파송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5년 3월 31일 나가사키를 출발, 한국을 향하였고 부산에 잠깐 들렀다가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에 마침내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둘은 같은 날 함께 한국에 왔다. 이후 둘은 서로 협력하며 각자의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서로"언디"(Undy), "아펜"(Appen)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언디'는 새문안교회를, '아펜'은 정동교회를 창립했던 것이다.



언더우드 새문안 교회창설



만주에서 시작된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운동은 의주를 거쳐 국내로 연결되었고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서울과 소래 두 곳에 많은 세례지원자들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이와 함께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미국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선교에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부르클린의 한 평신도인, 맥윌리엄스의 선교기금 헌납으로 미국 북장로교회는 한국선교에 구체적으로 착수하게 되었고 의료선교사로 알렌을, 복음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임명, 한국에 파견하였으니 그에 의해 새문안 교회가 창설되었다.



언더우드의 발자취 요약(연대별)



1859. 7. 19 영국런던에서 John Underwood 와 Elizabeth Grant Maire 사이의 6남매중 넷째로 출생
(1866. 한국 입국한 토마스 목사 순교)
1869.(10세) 두 살 위인 형 Frederick Wills 와 함께 프랑스 볼로뉴 소년 기숙학교에서 2년간 공부
18** 미국으로 가족 이민(뉴저지 뉴더햄)
1874. 12. 뉴더햄 그르브교회(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전가족 등록.
그르브교회의 목사인 Maben 박사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해스브루크 소년학원에서 공부와 Maben
박사로부터 대학입시 특별교습
1877. 뉴욕대학 입학
1881. 뉴욕대학 졸업.
동년 아버지 별세.
동년 New Brunswick 의 네덜란드계 혁신학교(Dutch Reformed Seminary) 입학.
18** 1년여간 의학을 별도로 배움
1882.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한국이 문호 개방
1882. 1882년 말에서 1883년 초에 이르는 겨울, New Brunswick 신학교 선교사지원 학생모임에서 Altmans 가
한국에 관한 논문 발표
18** 1년간 고민 끝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고 소속 개혁교회 본부에 2차에 걸쳐 한국 선교 청원서 제출했으나 자금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함
18** 미국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도 한국 선교 청원서를 두 번 제출했으나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함
18** 뉴욕의 한 개혁교회의 청빙이 있었으나 신비한 음성을 듣고 한국으로 방향을 돌림
18**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부르클린의 평신도 맥윌리엄스가 한국 선교를 위해 1,250달러 헌금
1884. 신학교 졸업.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됨
18** 런던선교회 임원인 친척 Edward Jones 목사로부터 한국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토마스 목사의 순교사건(1866년) 등에 대해서 들음.
1884. 11. 네덜란드 개혁교회 계통의 뉴브런즈위크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
1884. 12. 16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향함
일본요코하마의 3개월 체류하는 동안 J.C. Hepburn 선교사 사택에서 미국성서공회의 Henry Loomis 로부터 한국상황을 설명 들었으며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을 만남.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중인 개화파인사 김옥균, 박영효등을 만남.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감리교선교사. H.G. Appenzeller를 만남
1885. 3. 31 나가사키를 출항, 한국으로 향하여 부산에 잠깐 들르다.
1885. 4. 5 오후 3시 제물포항에 도착.
1887. 9. 27 새문안교회 창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