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 교회 표어
모이기를 힘써, 생명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행 2:46-47)

초기 기독교 접촉과 전래 가능성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때가 어제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서양인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훨씬 이전에 이 땅에 이미 복음의 접촉이 있었음은 현재 여러 측면에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 중 역사적으로 가장 멀리까지 소급되는 설(說)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경교(景敎)의 한국 전래설'이다.
경교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기독교의 중국 한자음 명칭이다.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어 로마에서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동방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당시 동서무역로였던 비단길을 따라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635년, 곧 당(唐)나라 정관(貞觀) 9년이었다. 알로펜(Alopen ;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선교단은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태종은 장안에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을 위해 대진사(大秦寺)란 사찰을 지어주고 전속 승려 21명을 배속시켜 주었다. 이 네스토리우스파는 처음 페르시아에서 왔다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음을 따 파사교(派斯敎)로 불렀으며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경교(大秦景敎)라 불리기도 했다. 경교란 '큰 종교'란 뜻이다$004
이후 200여 년 간(AD 600~800)네스토리우스교는 경교라 명칭하에 중국에서 상당하 교세로 발전했었다. 즉 불교이 형식과 거의 동일하게 목탁을 치며 예배를 드렸고 불경(佛經)의 형태를 빈 여러 종류의 한문 교리서를 제작하였다. 아무튼 경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回敎)와 함께 삼이사(三夷寺)라 하여 서방에서 유입된 종교로 중국 안에서 상당한 교세로 번창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가 경교란 이름으로 중국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가던 무렵은 우리나라가 당나라와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7~8세기)라는 점에 주목할 때 그 전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과 통일 이후에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고 이들이 귀국할 때에는 불경, 불상, 사리 등 불교관계 물품들과 한께 중국에서 생겨난 새로운 학문의 신경향과 사상을 들여왔다. 바로 이러한 점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국 내에서 그 위세를 크게 떨치고 있던 경교가 들어오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학문적인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이지만 1928년 고구려 영토였던 압록강 연변의 만주 안산(鞍山) 지역에서 경교도들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출토된 와제(瓦製) 십자가라든지, 1956년 경주에서 발굴된 십자형 돌과 마리아상 그리고 도에 십자가 등은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유물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복음 접촉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접촉은 임진왜란(1592~1598) 중에 이루어졌다. 이 전쟁은 일본의 무력 침략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人命)과 재산의 피해를 입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한국인은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두 가지 면에서 그 접촉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 전쟁 중에 최초로 우리나라에 기독교 성직자가 발을 들여 놓았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 한국인들의 기독교 개종이 이루어졌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이다. 이미 일본에는 1549년 예수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사비에르(Francesco Xavier)가 도착하여 선교에 착수, 많은 영주(領主=大名)들을 교인으로 얻고 있었다. 예수회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反)종교개혁운동으로 일어난 천주교신앙 운동의 결과를 창설된 선교단체이다. 예수회는 우세한 서구의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여 호응을 받았으며 '기리시단(切支丹 또는 吉利之丹)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임진왜란 중 선봉장으로 한국을 침략한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바로 기리시단 다이묘(大名)였다. 고니시 휘하에 잇던 소오(宗義智), 아리마(有馬信), 오오무라(大村喜前), 마츠우라(松浦鎭信)등 장군들도 기리시단이었다. 고니시는 한국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휘하 장병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본국(日本)에 있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를 불러들였다. 세스페데스는 1593us 12월 27일 응천(能川, Comgai, 진해 부근)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써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으나, 고니시와 경쟁관계에 있던 불교도 장군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방해로 1959년 6월 본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2년 뒤인 1597년 3월 다시 한국을 찾은 세스페데스는 1년 6개월 도안 왜군 진중에서 종군사제로 활약하였으나, 일보군의 종군사제였던 만큼 피침략국인 한국에 대한 선교활동은 기대할 수 없었다. 침략군인 일본군의 사기를 양양시켜주기 위한 성사(聖事)에는 성과가 있었으나 침략군인 왜군에 속해 있고 더욱이 이상한 모습을 한 서양인에게 한국인은 누구도 접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선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성(城)에서 성으로 용감히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질서없는 행동과 싸우면서 나쁜 버릇을 바로잡고 성사를 행함으로써 일본인 교우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을뿐더러 이교도이던 많은 일본 군사에게도 세례를 주었다."고 하지만 한국인에 대해선 전쟁 중 포로가 된 한국인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지 말라는 충고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세스페데스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성직자였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보에 끌려간 한국인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생겨남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복음 접촉이 이루어졌다. 7년에 걸친 전쟁 중 일본에 잡혀간 한국인은 대략 6~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에 전후 양국의 협정으로 귀한한 포로는 7천 명 정도밖에 안된다. 결국 6만 명 이상의 한국인은 마카오·인도 방면에 팔려가거나 일본에서 노예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들 중 소수는 재질(才質)을 인정받아 대접을 받으며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고 좋은 후원자를 만나 고생을 면하기도 했다.
주로 기리시단 가정으로 팔려간 포로들이 그같은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고니시의 딸인 마리아 부인이 고니시에게서 선물로 받은 한국인 2명을 신학교에 보내 성직자로 키운 것이 그 예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들 가운데 10년 동안 세례받은 자가 7천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에는 1606년 이탈리아 로마까지 간 안토니오 꼬레아 같은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017
이러한 한국인 교인들의 신앙은 1611년 이후 100여 년 간 계속된 일본 기독교 박해시대 중에 순교의 꽃을 피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1611us 기독교 금압령을 내려 선교자들을 추방하고 교인들을 체포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박해가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는데 수많은 순교자가 이 기간 중에 나왔다. 이들 순교자 가운데 뚜렷이 '조선인'으로 표기된 인물은 21명에 이르며 그 중 10명은 1867년 순교 복자(福者)의 칭호를 받기까지 했다. 이들은 대부분 나가사키(長崎) 지방에서 순교하였는데 예수회 전도회장이었던 가이오(Caio), 예수회 수사(修士)였던 권 빈센트(權 Vincent) 등 유력한 위치에 있던 인물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일본에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첫 한국인 고백 교인이 탄생했고 그 중에 상당수 순교자까지 나왔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주교의 수용과 박해


일본에서 싹트기 시작한 한국인들의 신앙은 그대로 한국에 전달되지 못했으나 17세기 중엽부터 중국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일본 선교에 성공한 예수회는 바로 이어 중국 선교에 착수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선구자였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한 그는 중국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중국인이 원하는 중국식 방법을 쓰며 상류층에 접근하였다. 서양 문명의 이기(利器) 제작을 통해 중국인들의 호감을 샀던 것이다. 그 결과 1601년에는 명(明)의 수도 북경에 들어가 신종(神宗)으로부터 선교사 체재 허락을 받았다.
리치 이후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도 같은 선교정책을 갖고 우선은 시계·지도·망원경·분수대 같은 이기들을 제작하는 한편 서구 과학을 내용으로 담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찍어 냈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얻어가면서 기독교(천주교) 교리를 담은 책들을 조심스럽게 찍어 내기 시작했다. 1603년 북경에서 간행된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들 한역서학서들이야말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학자층에게 소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업적, 서양의 이기들과한역서학서들이 한국에 유입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전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明) 왕조 이후 들어선 청(淸)국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을 통해 굴욕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다. 한국에서 파견되는 정기 사절단만도 일 년에 네 차례였고 그 외에도 부정기적인 사절단이 수시로 북경을 방문하였다. 단순한 외교적 업무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경제 및 문화교류도 이 사절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631년 정두원(鄭斗源)이 예수회 신부 로드리퀘즈(J. Rodriques)를 만났으며 병자호란 볼모로 청에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북경에 머무는 동안 아담 샬(Adam Schall)과 접촉하였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통해 한국 선교를 실현시키려는 꿈을 갖기도 했으나 귀구 직후 소현세자의 급작스런 죽음(1645)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 초부터 꾸준히 유입된 한역서학서들은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초기에 유입되어 읽힌 대표적인 한역서학서들로는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칠극》(七克), 《직방외기》(織方外氣), 《교우론》(交友論), 《진도자증》(眞道自證), 《서학범》(西學凡), 《천학초함》(天學哨艦) 등을 꼽을 수 있다.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구의 문명과 함께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실체를 접하게 된 한국 유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로 입장이 나뉘었다. 첫째는 벽위(闢衛)의 입장에서 적극 배격하는 태도였으니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이헌경(李獻慶)·유몽인(柳夢寅)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둘째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데 동양의 도, 즉 유교의 기본 교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서양의 이기(利器)들을 수용하자는 태도이다. 북학파(北學派)로 분류되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등을 꼽을 수 있다. 셋째는 서학을 전면 수용하자는 입장인데 중부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 계통 유학자로서 이벽(李檗)·권일신(權日身)·이가환(李家煥)·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정약종(丁若鐘)·이승훈(李承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서학파(西學派)란 칭호를 받고 있었는데 서구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천주교 신앙과 윤리를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적인 색채를 따지자면 남인(南人) 계열에 속하는 이들 서학파 유생들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18세기 중엽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1770년경 홍유한(洪儒漢)이 개인적으로 소백산 밑 구들리에 들어가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며 죽기까지 신앙생활을 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에서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이벽·권철신·권일신·정약종·정약전·이승훈·이가환 등이 참석한 강학회는 연구뿐만 아니라 기도와 묵상, 재계(齋戒)를 지키는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하던 중 보다 정확한 신앙의 실체를 알고자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했다.
1783년 가을에 동지사의 일행으로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그곳에서 북천주당의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 1784년 2월에 세례를 받고 그 해 봄에 돌아왔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천주교회의 직제를 모방해 한국인 교인들끼리 주교·사제 등을 맡아 교회 조직을 갖추었으니 소위 모의교회(模擬敎會) 또는 가성직(假聖職)시대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의 인도 없이 한국인들의 구도(求道)행위에 의해 자생적(自生的) 교회로 시작되었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며, 훙 살펴볼 개신교의 교회 창설도 같은 양상을 띤다.
이승훈·이벽·권일신 등이 중심이 된 자생 천주교회는 중인(中人) 김범우·최인길·최창현·지황 등을 입교시켜 신앙의 저변확대를 꾀하는 한편 충청도·전라도에까지 전도하였다. 1794년 말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며 교회 조직과 교인들의 신앙지도에 힘쓰기 시작함으로써 그가 입국한 당시 4천 명에 불과했던 교인수는 1800년에 이르러 1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수난과 순교의 역사였다. 천주교가 수용된 영·정조 시대 이후 대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사건이 10여차례 있었다.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金範寓)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정부 관리에게 체포되어 김범우 등이 죽음을 당한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을 필두로, 1791년 교인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조상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버린 일로 체포되어 순교한 신해교난(辛亥敎難), 1795년 주문모를 체포하려는 정부에 대항하여 유유일(尹有一)·최인길(崔仁吉)·지황(池璜) 등이 스스로 목숨을 희생시킨 을묘교난(乙卯敎難) 등이 비교적 초기에 당했던 소규모 박해였다. 그 후 1801년 순조의 즉위와 함께 전국적인 범위로 확산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천주교는 호된 시련을 겪었다.
주문모 신부 이하 이승훈·정약종·최창현·홍교만·이존창·김건순·강완숙·황사영 등 지도급 인사 100여 명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 외에 400여 명 교인이 유배됨으로써 천주교 조직은 와해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후에도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금압정책은 변하지 않았으며 교회를 재건하려는 천주교이들과 이를 분쇄하려는 정부 당국 사이의 갈등과 마찰은 계속되었다. 1811년과 1825년 천주교인들은 북경 주교와 로마 교황에게 선교사 파송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했고, 이에 1831년 로마 교황에 의해 조선교구가 중국 북경교구에서 독립되어 설정되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 선교를 담당하면서 프랑스인 신부들이 입국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책도 강경하여 1839년에 앵베르(L.M.J. Imbert) 주교 이하 모방(P.P. Maubant), 샤스탕(J.H. Chastan)등 외국인 신부와 정하상·유인길·조신철 등 천주교 지도자들이 순교한 기해교난(己亥敎難)이 일어났다. 이어 1846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순교한 병오교난(丙午敎難)이 일어났고,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교난(丙寅敎難)이 일어난 이후 10년에 걸쳐 외국인 신부 9명과 남종삼(南鐘三)·홍봉주(洪鳳周)·장주기(張周基) 등 8,000여 명이 순교하는 한국 천주교 최대의 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면서 정부 차원에서는 종식되었으니 1784년 이승훈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영세를 받음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100여 년 간 한국 천주교는 박해와 수난 속에서 자란 셈이다. 박해 속에 뿌리를 내린 한국 천주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첫째, 한국 천주교는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자생교회로 출발하였다. 선교사들의 선교행위가 전제되지 않은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구도행위는 복음에 대한 한국인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을 개신교의 경우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둘째, 박해를 받으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신앙의 대중화이다. 처음 천주교를 믿은 유식·양반 계층은 경기도·중부 지역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전라·경상, 멀리는 북부 지역의 산간·농촌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즉 한국 천주교 역사는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니, 이 점 으 후의 개신교 경우와 상반된 현상이었다.
셋째, 신앙의 대중화에 따라 한글 보급이 확대됨은 물론 새로운 서민문화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즉 일반 서민의 글인 한글을 이용한 교리서적을 발간해 냄으로써 한글문화를 창출해 냈고 서민들의 노래곡조를 딴 4·4조의 천주가사(天主歌辭)는 근대 가사문학의 한 흐름을 계승한 거이기도 하다. 종래의 양반·유식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유교문화의 한계를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서민문화 형성이 천주교 신앙운동으로 가능하게 된 셈이다.
이같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는 천주교의 역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으니, 19세기 초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개신교의 한국 선교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