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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샬롬 박용균목사입니다.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13-07-09 오전 11:45:06
조회 2433

 

[WCC 찬반토론회, 찬성측 압승]

 

  부산서 열린 토론회, "반대측조차 정병준 교수 의견에 귀 기울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를 앞두고 지난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벌어졌던 찬반 토론회가 시종 팽팽한 긴장감 속에 진행됐다. 하지만 토론회를 마친 뒤에는 찬반 양측에 뚜렷한 희비의 쌍곡선이 그려졌다는 평가가 대다수여서 WCC 총회를 강하게 반대해 오던 부산의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는 촉매가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진단들도 줄을 잇고 있다.

부산기독언론인협회(회장:천영호) 주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는 찬성측에서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 교회사)가, 반대측에서 최덕성 교수(브니엘신학교 교의학)가 패널로 나서 'WCC, 오해인가 진실인가'를 주제로 진행됐다. WCC 총회 부산준비위원회와 WCC 부산 총회 철회 촉구위원회 관계자 등 4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어진 이날 토론회는 결과적으로 찬성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정병준 교수는 동성애 논란부터 일부다처제와 용공, 종교다원주의 의혹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고, 특히 WCC의 독특한 의결방법인 '컨센서스(consensus)'를 소개하면서 청중들의 관심을 하나로 모은 반면 최덕성 교수는 논리보다는 감정에 치우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종의 전원합의 의결방법인 '컨센서스'는 WCC가 신학이나 직제, 선교 등 정체성과 관련된 결의를 할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회원교회 중 하나라도 반대할 경우엔 결의를 할수 없는 구조다. 따라서 WCC가 동성애 지지나 용공, 종교다원주의 등 반대론자들이 의혹을 품고 있는 부분들을 공식적으로 결의할 수 없는 원천적인 보호장치가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공개됐다.

토론회를 참관했던 WCC 총회 한국준비위원회 국내협력국 국장 김상만 목사도 "정병준 교수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지적에 최덕성 교수가 점차 토론의 주도권을 잃어갔다"면서, "토론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반대측 청중들이 토론회가 진행될수록 정 교수의 설명에 흥미를 갖고 귀를 기울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편 WCC 총회 찬반토론회를 부산에서 수 차례 더 열자는 여론도 확산되고 있다. 이번 토론회를 주최한 부산기독연론인협회 회장 천영호 장로(본보 부산지사장)는 "WCC 총회에 대한 부산의 여론이 매우 좋지 않은데 이번 토론회가 분위기 반전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면서, "토론회 직후부터 찬반 토론회를 더 열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줄을 잇고 있는 만큼 조속한 시일 내에 2차 토론회가 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기독공보 [2905호] 2013년 07월 01일

 

[세계교회협의회를 향한 비난에 대한 한 응답]

부산토론(2013. 6. 24).

 

 

정병준 목사(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저는 예장통합 측 소속 목사이며 서울장신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정병준입니다. 사실 저는 호주 멜버른에서 호주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한국선교 활동을 연구한 선교역사가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경험한 에큐메니칼 활동의 세계는 최덕성 교수님이 분석하고 지적하시는 것처럼 교리적이고, 신학적이고 딱딱한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청년시절 에큐메니칼 쪽 기독청년운동을 했고, 자마이카에 가서 선교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대원 시절에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야 이론적인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의 관심은 한국교회 장로교회가 200개 이상 분열되어 있는데 왜 이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분열은 보수적이고 정통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 사이에 분열이었습니다. 분열은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교리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분열은 죄성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에큐메니칼은 교회의 본성에 속한 것이며 그것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는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덕성 교수님이 쓰신 「신학충돌 II」를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글을 읽고 느낀 점은 1) 대단한 집중력과 종합성을 가지고 책을 구성하셨다는 놀라움입니다. 가볍게 볼 분은 아니구나 하는 놀라움이 생겼습니다. 2) 그러나 전반적으로 WCC 문헌을 인용하실 때 비판하는 데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였고, 작위적 해석이 많아서 본래 의도를 잘 전달하는 비판이 된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간단한 역사와 방향을 소개하고, 그 WCC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응답하도록 하겠습니다.

 

1.현대 에큐메니칼 운동 출현의 역사

교회사에서 18-19세기는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선교의 역사였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선교현장은 크게 세 가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첫째 서구교회 선교활동이 식민지 확장과 함께 했다는 비판입니다. 식민지에서 반기독교 토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둘째, 서구교회에서 일어난 교파를 선교지에 그대로 이식했다는 비판입니다. 셋째, 교파 선교사들 사이의 경쟁입니다.

그래서 1910년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렸고, 선교를 에큐메니칼적으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1920년대 유럽 교회들 사이에 함께 봉사하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신학적 일치를 추구하자는 운동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1938년에 봉사운동과 신학운동이 연합해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일어나 1948년 WCC가 창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운동은 1961년에 WCC에 합류합니다. WCC는 세계교회들의 선교, 봉사, 신학의 세 가지 흐름이 합류한 것입니다.

 

2.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가지 방향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첫째는 교회들 사이에 일치와 친교를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둘째는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섬기는 일입니다. 셋째는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첫째 교회의 일치는 기독론과 삼위일체 신앙에 기초해서 시작됩니다. WCC헌장은 “WCC는 성경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친교(Fellowship)이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WCC는 현재 110개국 349개 회원교회가 가입해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을 전했던 미국장로교회, 미국감리교회, 호주연합교회, 캐나다연합교회, 성공회가 있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던 루터교회, 스위스개혁교회, 스코틀랜드장로교회도 회원교회입니다. 그리고 가장오래된 교회전통을 지키는 시리아정교회, 무슬림 박해에서 살아남은 그리스정교회, 공산 치하에서 살아남은 러시아정교회도 있습니다. WCC 회원교회가 되려면 그 나라의 회원교회들이 전부 찬성을 해주어야 합니다. 간단하게 회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WCC의 에큐메니칼 일치의 방향은 인류의 일치입니다. 이것은 주로 정의와 평화의 차원에서 윤리의 문제를 다루며 교회론적 일치와 구분되는 것입니다. 일부 비판적 학자들은 인류의 일치, 세속의 일치(wider ecumenism)를 신앙을 혼합한다고 하는데 잘 모르고 하시는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왜 세속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가? 교회일치와 인류의 일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20세기에 들어와서 인류는 민족주의 문제로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렀고 이 과정에서 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일본을 제외하고) 기독교국가들 사이에 전쟁이었습니다. 둘째 이념문제입니다. 인류가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으로 분열되면서 교회도 이념구조로 분열되었습니다. 셋째 인종차별문제입니다. 백인의 교회와 흑인의 교회, 차별하는 교회와 차별받는 교회로 분열됩니다. 인류분열은 교회분열의 주요원인 이기에 WCC는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1,2차 대전이후 WCC는 교회재건에 집중했고, 전쟁국가들의 교회들 사이를 화해시키는데 노력을 했습니다. 냉전 하에서 한국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WCC는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UN군을 파병을 제일 먼저 요청했고, 전 세계 교회를 움직여 한국교회와 사회를 구호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동구권의 교회들을 서방세계로 끌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용공이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인종차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아공과 짐바브웨 독립과정에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했고, 그 결과 게릴라 지원의 비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회주의 몰락이후 현대사회는 「문명의 충돌」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즉 국가 간 전쟁의 원인이 전통, 문화, 종교적 차이의 방식이라고 봅니다. 종교간 갈등은 인류분열의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임원으로 있는 세계선교협의회(CWM)가 리빙스턴 탄생 200주년기념으로 모였습니다. 여기서 발표된 이야기 하겠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신구교 합쳐서 0.5%, 힌두교 14%, 나머지가 무슬림입니다. 원래 종교분쟁이 적었는데,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전쟁 이후 중동 지역에서 막대한 자금을 보내서 극우 무슬림을 육성했고, 힌두교인과 기독교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말레시아 교회도 기독교인구 9%가 이슬람인구가 60% 상황에서 소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간 대화를 통해 국가로부터 안정과 평등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WCC는 이러한 종교간 충돌이 소수 기독교회의 생명과 관계되기 때문에 종교간 대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에큐메니칼운동은 생명보존 생태계 보존에 관계합니다. 남태평양에 키리바티라는 섬이 있습니다. 인구10만명 중에 52%가 가톨릭, 42%가 개신교인입니다. 그런데 해수면 상승으로 토지가 침수되고, 식량과 신구가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향후50년안에 섬은 잠기게 되는데 이들은 다른 곳에 이주해야 합니다. 교회차원의 대책을 요청했습니다. 창조보전의 문제는 교회의 선교적 과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개교회가 일일이 대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교회차원의 정보와 협조 도움을 통해 회원교회들의 어려움을 선교적으로 돕게 되는 것입니다.

 

3. 교회 일치의 중요성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된 기관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벧전2:9), ‘그리스도의 몸’(고전12:27), ‘성령의 성전’(고전3:16)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본질상 한 분이면서 삼위라는 다양성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교회는 본질상 하나이지만 다양한 교파교회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시적이든 불가시적이든 본질적으로 하나 됨의 공교회성을 지향합니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나 교파적 다양성을 무시한 일치는 획일주의로서 받아들여서 안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교파전통을 존중하면서 친교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분열주의로 가면 통전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치 치하에서 루터교회는 세계교회와 단절하고 히틀러를 지지했습니다. 일제하 일본교회도 세계교회와 단절하고 일본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전쟁의 협력도구가 된 것이다. 남아공화국에서 백인정권이 흑인들을 탄압하고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을 때, 소위 칼빈주의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들은 성경을 사용해서 정권이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신학을 제공했습니다. 그것은 반성경적 반인륜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개혁교회연맹과 WCC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세계교회들은 이들과 관계를 단절하기도 했다. 개혁교회와 복음주의를 강조해도 교회가 공교회성을 상실하고 인류보편 질서와 멀어지면 죄악의 도구가 되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복음주의도 중요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고 교회의 공교회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7세기 개신교정통주의 시대는 자기 교파만을 절대화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결국 ‘독일30년 전쟁’을 일으켰고 유럽이 초토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파 절대주의의 냉혹함을 벗고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경건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기독교 교파들 사이에 이단 정죄는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일제탄압시기에 세계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05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YMCA총무 질레트가 그것을 폭로했고, 세계교회의 여론을 움직여서 일본이 고립되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세계교회가 일본의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1928년 예루살렘에서 국제선교협의회(1928)가 있었을 때, 일본 감리교 우자키 감독에 대해 김활란 박사가 “식민지교회의 자유가 없는 한 교회연합체는 진정한 교회를 대변할 수 없다”는 강력한 발언을 하여 참가자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습니다. 독일고백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을 준비하던 기구는 고백교회와 교제를 갖고 지원을 하였습니다.

 

4. WCC가 단일교회를 추구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WCC가 천주교회 같은 초단일교회를 주장한다고 비난했던 사람은 ICCC의 칼 매킨타이어 박사였습니다. 그래서 1950년 7월 WCC는 중앙위원회가 “토론토 성명”을 발표합니다.

 

1) 세계교회협의회는 단일교회(Super Church)도 아니고 결코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2) 세계교회협의회의 목적은 교회간의 연합을 협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간의 연합은 (연합을 원하는) 교회의 주도로 교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일뿐 (세계교회협의회가 하는 일은) 교회들이 서로 접촉하고 교회 일치 문제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촉진하는 일이다.

3) 세계교회협의회는 특정한 교회 개념에 기초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론적 문제를 예단하지 않는다.

4)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 된다고 해서 그 회원교회가 자기 교회의 개념을 상대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5)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 된다고 해서 교회 일치의 본질에 관한 어떤 특정한 교리를 수용해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WCC는 교파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하나로 통합할 수 없고 회원교회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WCC 회원교회들도 단일교회의 회원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WCC는 다양성속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다양한 교파들 안에 교리와 의식, 예배와 예전, 전통들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바닥에 성경, 삼위일체신앙, 니케아신조, 세례, 성만찬 같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 일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과 관계된 통일성에서 벗어난 다양성은 일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시적 일치를 표현하는 방법은 협의회적 친교도 있고, 예배 성만찬을 함께 하는 방법도 있고, 공동의 신앙고백을 같이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교단을 섞지 않고도 일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WCC ‘공산게릴라 지원설’ 및 용공설 사실인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WCC용공설과 게릴라 지원설이 한국교회 안에서 선전되고 있습니다. 그주장의 배경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WCC는 1969년부터 78년까지 인종차별정책반대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그 배경은 1960년 남아공의 샤프빌(Sharpeville)에서 흑인 69명이 경찰 발포로 사망했고,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WCC총회 연설 4개월 전에 암살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프로그램이 시작됩니다. 1976년에도 남아공 소웨토(Soweto) 학생 봉기로 1000여명이 사망합니다.

WCC와 세계교회, 유엔의 반인종차별정책으로 남아공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이때 남아공의 수상, 정보부 장관 물더, 군장성 등이 연합해서 유명한 “물더게이트(Muldergate)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불법적으로 8000만불을 조성해서 방송사, 언론사를 구입하거나 매수해서 남아공을 우호적으로 선전하는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WCC에 대한 신뢰를 악화시키는 공작을 했습니다. 그 책임자가 정부국장 에스첼 루디(Eschel Rhoodie)인데 훗날 서방세계로 망명을 해서 이 공작을 폭로했습니다.

남아공정부는 우파기독교단체인 남아공 교회동맹(CLSA) 프레드 쇼(Frd Shaw) 목사에게 공작금을 주고 런던과 워싱턴에 사무실을 열고 활동했습니다. 1978년에 그리고 성공회선교사였고 훗날 로데시아 백인정부 상원의원이 된 아더 루이스(Arther Lewis)는 16번 미국을 방문하여 각계 요로와 우익단체들에게 자금과 홍보자료를 제공했습니다. 그중에 한사람이 칼 매킨타이어로 한국교회에 WCC용공설을 퍼뜨린 사람입니다. 이 사실은 1980년에 조사를 통해 루디의 증언이 사실이었다고 밝혀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남아공정부는 복음주의신학자들을 매수해서 WCC를 비난하도록 했습니다. 쇼우와 루이스는 남아공선교사 8년을 지내고 튀빙겐 대학에서 선교학교수로 있는 피터 바이에르하우스(Peter Beyerhaus)를 접촉해서 1978년 국제기독교네트워크(INC)를 만들었습니다. 몰론 공작금으로 한 것입니다. 바이에르하우스는 최덕성 교수님도 자기 책에서 그 사람을 인용할 정도로 우파 복음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영국저널리스트 데릭나이트(Derrcik Knight)는 “친 남아공, 친인종차별정책의 로비”라는 것이 탄로 나지 않게 진행했다고 합니다.

바이에르하우스는 첫째로 1974년에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난하는 「베를린 선언」(Belin Declaration on Ecumenism) 작성했습니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1. 반기독교적 유혹으로서 휴머니즘

2. 교회를 분열시키는 새로운 양극화

3. 우리는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다.

4. 진정한 자유는 오직 성서 안에 계시되었다.

5. 진정한 자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공된다.

6. 진정한 자유는 오직 복음 안에서 실행된다.

7. 세계적으로 연합된 초교회는 없다.

8. 세계적으로 연합된 세계기독교는 없다.

9. 세계적으로 연합된 공동체는 없다.

10. 에큐메니즘은 혼란의 영이다.

11. 에큐메니즘은 세계일치를 준비하는 정복전략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남아공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해 신앙의 양심으로 비판하면서 이런 작업을 했다면 어느정도 순수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아공 인종차별정책의 공작에 말려서 정치적으로 WCC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게릴라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게릴라 문제와 공산주의 문제는 자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데릭 나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략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정의로운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피터 바이에르하우스가 만든 ICN 단체는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1986에 「리더스다이제스트」잡지와 60 Minute 방송은 WCC 게릴라설을 주장하면서 WCC와 미국 NCC를 공격했습니다. 그 작업은 종교와 민주주의 연구소(Institute for Religion and Democracy)의 직원들의 의해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소에 재정을 제공한 사람은 무기수출회사(Olin’ Winchester rifle corporation) 사장 올린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정부가 금지한 남아공에 무기를 수출해서 조사를 받았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한국에 와서 자금을 뿌리고 ICCC를 뿌리내리려고 했던 칼 매킨타이어는 어떤 활동을 했는가 봅시다. 첫째 남아공정부의 재정을 지원받아서 사용했습니다.

교회동맹의 지도자 프레드 쇼는 1983년 6월 17일에 나와 인텨뷰를 할 때, 그가 칼 매킨타이어가 이끄는 근본주의 교회들의 우익 협의체인 ICCC의 뉴저지 연례대회에 참석하는 동안 이런 방식으로 남아공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고 승인했다.

둘째 매킨타이어는 ICCC 조직을 FBI 공작 활동에 사용했습니다. 아래 자료는 "FBI의 국내정보조사활동 사례 보고서"(CASE : THE USE OF INFORMANTS IN FBI DOMESTIC INTELLIGENCE INVESTIGATIONS)입니다.

공작사례2 - 매킨타이어의 ACCC(1971)

한 FBI 비밀공작원은 매킨타이어 박사가 조직한 단체(ACCC: ICCC의 미국지부)에 관한 정보를 보고했다. 이 단체는 다양한 자유주의 단체들과 "베트남 관련 성직자 평신도"에 대한 대항마로서 활동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한 기밀자료에서 나온 초기 보고서는 필라델피아, 발티모아, 워싱턴 D.C.안에서 NBC-TV스튜디오에 감시원을 배치하는 계획들을 언급하였고, 그 위원회 멤버들 전체 이름을 말하였다. 한 공작원으로부터 나온 이어지는 보고서들은 대통령(닉슨)의 중국방문을 반대하고 공립학교들 안에서 기도행위를 지지하는 그 단체의 계획들을 설명했다. 그 공작원은 또한 매킨타이어 박사의 선교단체들과 협력하는 그 단체의 집회들과 그 단체의 미래조직과 활동을 위한 계획들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WCC를 비난했던 우파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윤리에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반인륜적이고 반성경적인 남아공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기독교기구를 정보조직에 팔아넘긴 돈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에서 WCC를 반대했던 교단들은 매킨타이어의 ICCC와 깊은 관계를 가지거나, 남아공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활동과 주장은 이미 비윤리적인 것으로 서구사회에서 끝난 논쟁입니다. 한국교회 WCC 반대 단체들이 죽은 유령을 다시 끄집어 내어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WCC의 반인종차별지원정책은 인도주의 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지원을 받았던 로데시아는 1980년 독립을 했고, 남아공의 만델라는 1994년 평화롭게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신앙적으로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6. WCC의 ‘종교혼합주의’와 ‘다원주의’ 논쟁

  혼잡주의 문제와 다원주의 문제가 출현하게 되는 배경에는 종교간 대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WCC는 1961년 인도 뉴델리 이후 “종교간 대화”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국가들이 독립을 하면서 종교들 사이에 갈등과 정죄가 폭력과 분열로 몰아갔고 많은 교인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83년까지 종교간 대화는 혼합주의를 경계하면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잘 지켰습니다.

1989년에 WCC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 산안토니오 대회가 채택한 문서(Your Will be done and Christ’s Way)는 WCC의 구원론의 공식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이 길이 있다고 지적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어떠한 제한을 둘 수 없다.”

한국 복음주의자들의 일부는 이 문서를 다원주의 문서라고 취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말은 타종교의 구원을 간접적으로 열어놓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WCC 선교국 총무의 공식입장을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을 선포하는 유일한 신앙이다. 타종교의 신앙은 비역사적 신앙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통해 얻는 구원의 체계가 있지 않다. 따라서 기독교에만 있는 구원을 타종교의 구원과 관련시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능력에 어떤 제한을 둘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질문을 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 율법으로 살던 시대의 구원에 문제와

둘째,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기들의 구원 문제는 쉽게 답할 수 없다.

셋째, 기독교의 종말론은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이루어질 자연과 만물의 완성은 하나님의 신비로 두어야 한다.

요약하면 타종교 안으로 기독교의 구원이 확장된다는 것은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 예수를 시인할 수 없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과 종말완성의 부분은 하나님의 신비로 두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감리교적 차원에서 구원의 신비문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7차 캔버라 WCC 총회(1991년)에서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와 1990년 WCC 대화소위원회가 발표한 〈바아르 문서〉(Baar Statement)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 당시 신자유주의화 이후 경제적 어려움이 부각되면서 타종교들 안에 종교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WCC의 신학자들은 성령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배타적으로 역사하는지, 아니면 모든 영성과 종교들 안에서도 활동하는지 답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캔버라 총회는 성령론을 주제로 택하고 생명과 환경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이 총회에서 동방정교회는 성령은 위에서 오시는 것이고 성령론은 정통삼위일체론 안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정현경 교수는 성령은 위로부터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고난당하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초혼제를 했습니다. 이것이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정교회사람들과 복음주의권 사람들은 현장에서 퇴장을 했고, WCC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고, 정현경 교수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정교수의 초혼제가 결국 WCC입장 아니냐? 하는 것과 “이것은 정교수 개인 행동이다”라는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먼 훗날 누가 정현경 교수를 추천했는가 알아보았습니다. 당시 사실 WCC 사건이 있기까지 정현경 교수는 그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여신학자들이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신들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예상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WCC지도부가 신학적 실험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사실 WCC에 대한 큰 어려움을 준 사건입니다.

또 하나의 다원주의 논쟁은 웨슬리 아리아자가 중심이 되어 만든 〈바아르 문서: 다원성에 대한 신학적 관점〉입니다. 종교간 대화 소위원회에서 작성해서 제7차 총회 연구문서로 올라왔습니다. 이 문서는 산티아고 대회의 주장을 훨씬 초월해서 다원주의적 입장을 택했습니다.

〈바아르문서〉는 제7차 WCC총회에서 공식입장으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성령론 논쟁에 있어서 WCC의 공식적인 입장은 캔버라 총회 제4분과 보고서에서 정통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성령은 성삼위일체의 삶과 분리해서 이해될 수 없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성령은 그리스도시오, 메시야며, 세상의 구세주 되시는 나사렛 예수를 가리킨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힘을 주어 공동체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그들의 사역을 성취하게 하신다. 성령은 성삼위일체의 본질 그 자체로서 ‘거룩’하시다. 성령은 이 세상의 다른 ‘영들’ ― 그것이 선한 영이든 혹은 악마적이든지 간에 ―과는 구분된다(요일 4:1-6) (81항)

영들은 분별되어야 한다. 모든 영이 성령께 속한 것은 아니다. 성령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사실이다.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을 지시하고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한다. … 이러한 기준들은 우리가 종종 다른 종교들의 심오한 영성과 접할 때 기억해야만 한다. (93항)

또한, 그러나 WCC안에는 다원주의자들이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는 다원주의자들의 활동이 일부 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WCC는 열려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교파교회처럼 이단정죄나 신학적 정죄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위험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주변에 늘 타종교인들과 다원주의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때로는 그들이 가족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들과의 만남이 내 신앙고백을 위협하는 수준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사실 WCC는 다원주의 입장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신학적으로도 그렇지만 상황적으로도 그렇습니다. WCC가 다원주의 입장을 공식으로 택하는 순간 대부분의 교회는 탈퇴를 하든지 지도부를 다 바꾸어야 합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기독교가 소수자의 종교로서 박해를 받는 여러 나라들 안에서 종교간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종교를 비방하게 되면 소수자 교회들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타종교의 상대적 선한 진리를 인정하고 기독교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현실주의 입장을 택하게 됩니다. 타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배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약자보호의 원리입니다.

 

자료1세계기독교인구분포

지구촌 인구

71억

 

 

 

기독교 인구

23억 5000만

천주교 12억 230만

개신교 4억 4000만

독립교회 3억 7000만

정교회 2억 8000만

성공회 9100만

 

타종교 인구

31억 2500만

이슬람 16억 3500만

흰두교 9억 8000만

불 교 5억 960만

미전도 인구

20억

 

 

 

한국선교연구원,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1월호)

 

 

[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이형기 (장신대 명예교수)

 

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그것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1. 에큐메니칼이란 말의 뜻: 에큐메니즘, 에큐메니시티(ecumenicity) 및 에큐메니칼이란 단어는 희랍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oikos(집)인데, 이로부터 oikonomia(집안 살림살이 = managing of the household)란 말이 나왔고, 이루부터 economy(경제, 그리고 신학에선 ‘경세’)와 ecology(생태학)란 말이 나왔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the whole inhabited world)이다. 희랍-로마 세계(the Greco-Roman World)에서 이 “오이쿠메네”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온 세상, 문명세계 혹은 희랍-로마 문화영역, 나아가서는 로마 제국을 의미했다. 신약성경에선 이와 같은 세속적인 의미로 15회 가량 사용되었고, 2-3세기에 이르면 이 용어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 속에 지역별로 흩어져 있는 세계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4세기에서 5세기 동안에는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처음으로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라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로 “에큐메니칼”이라는 말은 획기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그것은 교회들의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추구하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 교회의 사회참여에 해당하는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 복음전파와 하나님의 선교를 추구하는 “복음전도와 세계선교” 운동과, 이 세 운동의 신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세 운동이 WCC의 세 기둥인 바, 이 WCC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도구로서 세계교회들의 공식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1975년 ‘나이로비 세계교회 협의회’의 JPSS(A 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 = 하나의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 가능한 사회) 이후 오이쿠메네의 의미는 창조세계 보전 차원에서 온 우주를 아우르고 타 종교들과의 대화도 포함하고 있다. 1983년 벤쿠버 WCC 총회 이래 오늘날 세계교회의 중심과제는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 정의, 평화, 창조세계 보전)가 되었다.

 

2.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경적인 의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인류를 하나님께 화해시키시는 대제사장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한 코이노니아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 역시 다양성 속에서 코이노니아를 누리기(analogia trinitatis)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끝부분에 있는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는 그의 몸 된 교회에게 복음전파를 부탁하신 것이다. 즉, 교회일체를 위한 주님의 기도 목적은 교회의 복음전파이다. 그리고 골로새서 1:13-20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는 자들의 구속 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와 온 우주를 하나님께 화해시키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대체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영역일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 들이나 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 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 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교회의 역사는 교회들의 분열의 역사요 일치추구의 역사이다. 교파들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교리들과 직제들과 사회참여의 방법들이 다르다. 그러나 성경과 전통은 우리들에게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제시한다. 구약의 구속사를 배경으로 하는 신약의 ‘하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통일성에 해당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메시지들이 있고, 이것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교파들의 다양한 전통들이 있으니, 우리는 성경과 전통들 차원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찾아서, 교파들과 교파들의 신학들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대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이룸으로써, 역사와 창조세계를 하나님께 화해케 하는 과제(골 1:20절과 엡 1:10)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성경에 나타난 에큐메니즘은 아래에서 기술할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복음전도와 세계선교’의 성경적 근거이다.

 

3.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인류와 창조세계를 자신에게 화해시키셨으니, 이와 같은 화해의 복음사건 자체가 에큐메니칼 하다. 그리고 요한복음 17:21절에서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과 창조세계를 자신과의 영원한 코이노니아에 초대하심 역시 에큐메니칼 하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이 지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 역시 에큐메니칼 하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역사적 필연성에서 생기기 전에 성경 메시지 그 자체 내에 내장되어 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은 또한 역사적인 필연성에서 생긴 것도 사실(史實)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교회 시대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교구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을 통하여 이단들에 대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단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가 분열될 위기들에 직면했을 때, 공의회들의 교리결정들이 그것을 해결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운동의 좀 더 근대적인 기원은 19세기 복음주의 각성운동에 힘입은 세계 복음전도에 있었다. 즉,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여러 교파들은 상호 간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고, 교파에 대한 정체성보다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라투렛(Scott Latourette) 교회사 교수는 1817-1914년까지의 유럽과 북미의 역사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19세기에 개신교의 복음 선교가 절정에 도달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에 선교의 현장에서 교파들의 협력이 요청되었고, 교파를 초월하는 ‘복음’ 전파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1910년 세계선교 대회(WMC)의 폐막식에서 필리핀의 선교사로서 미국의 성공회 주교인 브렌트가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운동을 제안하여, 이 운동은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신앙과 직제’ 운동이 등장하였고,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 직전에 스웨덴의 루터교 주교인 죄더불럼이 “평화에의 호소문”을 전쟁 당사국들의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 교회에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이 출범하였다. 그리고 1910년 ‘세계선교 대회’(WMC)가 1921년엔 ‘국제선교 협의회’(IMC)로, 그리고 1960년대에는 WCC에 가담하면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위원회’(CWME)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리하여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세계 선교와 복음전도 운동’이 향후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을 결정하였다. 그런즉, 결국 WCC를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된 흐름은 셋인데, 이는 요한복음 17: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을 믿게 하옵소서)과 골로새서 1: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과 에베소서 1: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 나오는 성경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상과 같이 3흐름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고 1920년엔 동방정교회가 “국제연합”(The League of Nations)에 맞먹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koinonia ton ecclesion)를 제안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죄더불럼과 올드헴 역시 교회들의 연합체 구성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에 스톡홀름에서 제1차 삶과 봉사 운동 세계대회가, 그리고 1927년에 로잔에서 제1차 신앙과 직제세계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 두 대회의 대표들이 결국 1937년 케버트(McCrea Cavert)가 제안한 ‘WCC’(세계교회협의회)란 용어를 받아들여, 네덜란드의 유트레히트에서 WCC헌장이 작성되었다. 그 교리헌장(the Basis)은 성육신 교리와 칼세돈의 정통 그리스도론을 배경으로 하였고, 1961년 뉴델리 WCC 때에는 성공회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첨부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세계교회협의회란 성경을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일체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의 공동 소명을 함께 성취하려고 하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그리고 하라레 WCC 보고서는 WCC의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였다.

WCC 안에서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의 주된 목적은 서로가 서로를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만찬적 친교에 있어서 가시적 일치에 이르게 해야 하고,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배와 삶으로, 나아가서 세상에 대한 증언과 섬김을 통하여 표현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이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일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교회들은 신앙과 삶, 증언과 섬김으로 코이노니아를 추구함에 있어서 WCC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할 것이다.

- 상호간의 책임지기의 정신으로 용서와 화해, 신학적 대화를 통한 좀 더 심오한 관계의 발전, 그리고 상호 간에 인간적이고 영적이며 물질적인 자원을 함께 나누기를 기도 가운데 증진할 것이다.

- 각 장소와 모든 장소들에서 공동증언을 촉진하고 선교와 복음전도 사역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지지할 것이다.

- 인간의 필요를 채우고 사람들 사이의 장벽들을 허물며 정의와 평화 가운데 하나의 인류가족을 진척시키고 창조세계의 보전을 지속시킴으로써 섬김(diakonia)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표현하여,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삶의 충만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 교육과정을 통하여 에큐메니칼 의식을 고취시키고 각각의 특수한 문화적 맥락에 뿌리를 내린 공동체 안에서의 생명과 삶에 대한 비전을 키워나갈 것이다.

-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에서 그리고 타 신앙공동체들에 속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도울 것이다.

- 일치, 예배, 선교와 섬김에 있어서 갱신과 성장을 도모할 것이다.

4. 협의회, 협의회적 친교, 그리고 협의회성

WCC란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이니셜로서 우리말로는 ‘세계교회 협의회’라고 번역된다. 협의회의 기원은 사도행전 15:1-35절의 예루살렘 사도들의 협의회에 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제기된 문제, 곧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할례를 비롯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문제를 안디옥 교회 자체 내에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져와, 사도들 회의에서 해결하였고, 그 결과물(편지)을 안디옥으로 발송하였다. 이것을 효시로 하여, 고대 교회는 일곱 공의회를 열어 이단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세돈 공의회 등이 그 예라 하겠다. 그런데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라 불렀으니, 결국 고대교회역사 속에서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이 열렸다.

그리고 14-15세기경엔, 교회개혁을 위한 ‘공의회 운동’(conciliar movement)이 있었다. 이 운동은 파쥬아의 마르실리우스, 윌리엄 옥캄, 장 제르송, 피에르 다이 등에 의하여 주창되었던 바,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 위에 있다고 하는 성경적 근거(마 16:18-20; 행 15; 갈 2:11)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회의는 피사(1409), 콘스탄스(1414-1418) 등에서 열렸고, 특히 교황청의 아비뇽 포로기 동안에 그 힘을 발휘하였다. 비록 그 운동이 크게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개혁과 유럽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세계교회 협의회’(WCC) 운동은 바로 이상과 같은 공의회 운동 혹은 협의회 운동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교회일치 운동과 교회의 사회참여 운동과 세계선교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교회 협의회’ 산하 모든 운동은 그 성격에 있어서 세계교회들의 협의회적 친교를 통한 협의회 운동인 것이다. 일찍이 1975년 나이로비 WCC는 “교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진정한 협의회적 특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회적 특성을 반사시킨다.”(S. Ⅱ. Ⅱ. 5)고 하여 협의회적 친교”(conciliar fellowship)의 신학적 근거를 ‘삼위일체론’에 두고 있으며, 이와 같은 ‘협의회적 친교’를 통하여 ‘진정으로 연합한 지역별 교회들’로 하여금 보편교회를 지향하게 하였다. 나이로비의 주장을 읽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교회를 창설하셨지만, 오늘날 우리는 서로 분리된 다양한 교회들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우리가 다시한번 갈라지지 않은 한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로 사는 것이다. 이 목표가 어떻게 묘사될 수 있을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묘사를 교회들에게 숙고하게 하고자 한다. 하나의 교회란 자신들끼리 진정으로 연합한 개 교회들 혹은 지역 교회들의 협의회를 통한 친교로 묘사될 수 있다. 이 협의회를 통한 친교에 있어서 각개교회 혹은 지역교회는 타교회들과의 친교 속에서 완전한 보편성을 소유하고, 동일한 사도적 신앙을 증거하며, 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동일한 교회에 속하였고,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인도된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 ... (S.Ⅱ. Ⅱ. 3)

그리고 WCC는 서울 JPIC(World Convocation on 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를 “협의회적 과정”(conciliar process)으로 보고, 그것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WCC 회원교회들로 하여금 정의 평화 창조세계 보전에 대한 상호 참여(=언약)의 한 협의회적 과정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WCC 프로그램들 가운데 우선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CWC(Christian World Communions)의 연합운동을 통해서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협의회성’(conciliarity)을 잘 알 수 있다

 

Ⅱ. 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1. WCC는 성경을 어떻게 받아드리는가?

구약의 구속사를 배경으로 하는 하나의 사도적 복음(the Gospel Tradition)은 성경과 교회전통들의 원천과 통일성이다(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1963). 1927년 제1차 로잔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는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항상 복음이어야 한다. 복음은 현재와 미래를 향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인 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성령은 온 인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셨고, 무엇보다 구약 안에 주어진 그의 계시를 통해서 그의 오심을 준비하셨는데, 때가 차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성육하사 인간이 되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가르침, 그의 회개에로의 부름, 그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선포,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로의 승귀, 및 그의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셨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충만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보이신 완전한 사랑에 호소하시어 우리들을 신앙에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에로 부르신다(Ⅱ. 9-11).

이상과 같은 ‘복음’은 세상을 위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로서 성경의 중심 메시지이다. 이 “복음”은 인간을 “신앙”에로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이 없으신 사랑으로서 정통 기독론적기고 정통 삼위일체론적인 틀 안에서 주어졌다. 바로 이 “복음”을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롭다함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가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이다.

그런 즉, 신구약성경에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 1978년 벵갈 문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성서는 두 개의 책 묶음 속에서 하나의 주제에 의해 함께 모아진 다양한 많은 책들의 모음집이다. 우리는 그것들 속에서 전 창조세계와 민족들과 개개인의 삶을 다루고 계시는 하나이며 동일하신 하나님을 만난다. 구약과 신약의 다양한 증언들 안에서 통일성을 만드는 분은 바로 그 분이시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특별히 하나의 특정 민족을 다루시며 그 민족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다루시는 그분을 만난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그의 가장 충만하고 결정적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그분을 본질적으로 만난다. 성서의 이 하나님은 세계를 보전하고 그가 그것을 위해 세우신 계획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인간존재를 자신의 파트너로 원하시는 분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라고 말씀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104-105)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1983)에 따르면, 이상과 같은 ‘복음’(the Gospel Tradition)을 중심으로 하는 혹은 그것을 통일성으로 하는 성경은 ‘복음’에 대한 증언들로서 영감 된 말씀들이다. 그리하여 성경에는 다양한 메시지들이 있다.

성경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묶여진 책들은 역사의 과정 전체를 통하여 심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문학적 통일체( a literary unity)를 이루었다. 어떤 저작들은 포함되고 여타의 저작들은 제외된 사실은 교회역사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정경은 다양한 증언들을 모아 놓았고 석의의 역사를 결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다양성이었다.(84)

그러나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각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은 신약의 특수성을 6가지로 본다. 첫째로

신약성서의 특수성은 구약을 능가하는 한에 있어서 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다. 그분의 모습에서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자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그의 동반자로 삼기 위함이다. (108)

둘째로 “말씀 그 자체가 육체가 된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와는 비교될 수 없는 친숙한 방법으로 자신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속에 자신을 관여시키셨다.”(108) 셋째로

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그의 독특한 희생적 삶과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고, 모든 인간이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러 놓으셨다. 그런즉, 구약의 제사법과 규례들은 그것의 적합성을 상실하였다.(108)

넷째는 ‘부활’을 통하여 계시되고 약속된 미래 지향적인 초역사적 정의와 평화의 샬롬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인간 개인의 삶과 우주적인 역사의 궁극적인 운명이 명시되어졌다. 삶과 역사가 이 세상의 한계 안에서 완성될 수 없으며,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 너머에 있는 삶이고, 역사의 최종적 목표가 모든 것의 존재하는 가능성들을 넘어선 세계의 전체적인 변형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그것에 의해서 죽음의 최종성에 대한 구약의 믿음과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들을 다루시는 경세가 죽음 이편의 삶으로 제한된다고 하는 구약의 믿음이 대치되고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완전한 평화와 정의의 세계에 대한 구약의 희망은 변화되어져서, 그것의 완성은 역사를 넘어서고 있다. (108-19)

다섯째는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파송된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은바 됨에 따라, 향후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 보편적인 차원을 획득한다고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 혹은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합체시키시고, 이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을 세계적인 공동체로서 교회로 삼으시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성서가 살아있게 하신다. “따라서 구약성서 안에서 한 특정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있는 관심은 모든 세계에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정의가 더 이상 한 민족 안에 제한되어지지 않고, 거룩한 전쟁이나 정복한 적들을 진멸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거부되어 진다.”(109)

여섯째로 “구약성서를 능가하는 신약성서 속의 많은 것들이 미미 구약성서 안에서 발견된다.”

둘째로 ?... 성경의 권위와 해석?은 구약의 특징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신약을 능가하는 구약의 특수성에 다름 아닌데,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시요,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시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시는 심판자라고 하는 것을 구약으로부터 알게 된다.”(112) 둘째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위엄과 은폐성이 강조되어 있고, 세계정치에 대한 관심과 질투하심이라 불리는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셋째로 구약은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이들이 우주 안에서 하나의 관리인으로 자리 매김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더 큰 관심들이 나타나 있고, 우상숭배 유혹에 대한 경고가 강조되고 있으며, ...“. 넷째로 개인도덕과 개인주의적 윤리가 아니라 구조 악과 구조적인 변혁에 대한 요구들이 있으니, “사회의 구조들에 대한 관심, 정의에 대한 요구, 빈곤과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 하나님에 의해 버려짐에 대한 슬픔과 불평에 대한 관심, 그리고 매일의 삶을 위해 지혜를 부여하는 신앙의 중요성, ...”. 다섯째로 신약은 개인주의적이고 수직적이며 영적인 반면 구약은 공동체적이고 수평적이며 현세적이라고 한다. 즉,

그러나 그것들(네 번째에서 언급된 구약의 특수성들)은 신약성서가 그리스도의 계시와 신앙의 철저 화, 그것과 부합되는 삶의 개인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 보다 덜 분명하게 주목을 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구약의 요소들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무시될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의 맥락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 ... 그런즉,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내향적이며 이상적인 틀 안에 갇힐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약이 그것의 목적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세계적 차원에서 윤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보다 구약성서의 넓이와 깊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113)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1983, 제2판)은 아래에서 이와 같은 복음의 증언들로서 성서의 영감을 3가지로 지적할 때, “성경의 내용 그 자체가 권위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영감이다”라고 본다. 이는 적어도 이상의 3문서들에서 소개된 방식의 해석에 따른 성서의 내용이지만 말이다.

1. 성서는 파생적이지 않으며(non-derivative) 원형적인(archetypal)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격상 독특하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어느 한 구릅이 구약성경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독특한 것이며, 따라서 동양종교로부터 파생되어 질 수 없다고 하였다. ...

2.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서는 거듭 반복해서 신앙의 원천으로서 입증되어 졌다. 이러한 이유로 성서는 오늘날 우리들이 그것의 주장에 대해 복종해야 함을 주장할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

3. ... 연구보고서들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성서의 내용 그 자체가 권위 있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며,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위한 그 어떤 외부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을 포기하는 데에 동의한다. 권위는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86-87)

다시 말하면 본 저서는 영감론에서 출발하여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들을 감화시키는 성경의 메시지를 중요시한다. 적어도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사도들의 복음전승과 그것에 대한 증언들일 것이다. 아래의 인용을 읽어 보자.

만약에 확실하게 성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주장이 사람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체험되어 진다면, 성경 뒤에는 하나님 자신, 즉 성령의 활동하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에게 나타내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거가 아닌가? ... (87-88)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등 성경해석자들은 결국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 내용으로 우리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성서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해석이 성경이 성령의 저작물로 알도록 인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에 영향을 준 영감 받은 증인들의 긴 연속선을 기억해야만 한다. 첫 번째 증인들은 성령에 의해서 부름 받고 감화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의 마지막 최종 형태가 부여된 후, 성경해석자들의 증거는 동일한 성령으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다. 마치 성령께서 예전에 그의 증인들을 부르셨듯이, 그분이 우리에게 이러한 필요불가결한 증거들을 나타내게 될 때 그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신앙과 순종과 증거를 일깨우실 것이다. 성령은 교회 안에 살아계신다. ... (88-89)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의 통일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과 아울러 그것의 다양성 그리고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중요시 여겨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경으로서의 성경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즉, 우리는 본문비평과 역사 비평적 방법을 통한 다양한 석의에 의하여 본문의 다양한 의미를 찾아내면서 ‘복음 전승’(the Gospel Tradition)에서 통일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에 비추어 볼 때, WCC가 성서를 타종교들의 경전과 동격(同格)과 동가(同價)로 여긴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2.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그리고 재림을 거부하는가?

 

WCC는 첫째로 ‘성령잉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본 신조는 신약성경의 증언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확인한다. ... (121)

... 본 신조는 마리아의 모성을 지적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 한 어머니에 의하여 태어나시고 사랑받으시며 양친의 돌봐주심으로 양육을 받으시면서 우리 인간의 경험을 함께 나누신 분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 (122)

본 신조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주장함으로써 시간 속에서 탄생하신 마리아의 아들의 아버지이야 말로 영원한 차원에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께로 태어나신’ 영원하신 아들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신앙을 표현한다. (124)

둘째로 ‘부활’에 대하여 WCC는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죽음의 세력 안에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다고 하는 시실을 믿고 있다. 이들은 부활이 없었으면 “우리의 전파(설교)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니”(고전 15:13-14)라고 하는 의미만큼 부활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및 이 고백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성령의 성물을 교회의 삶과 정체성의 기초로, 전 세계를 위한 소망의 근거로, 그리고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으로 고백하고 있다.(176)

셋째로 ‘재림’에 대하여 WCC는 다음과 같이 희망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이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가진 승리자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이들에게 삶의 변화를 허락하사, 약속된 안식의 날이 종국적으로 수립될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자들이야 말로 창조와 구속의 기쁨을 함께 나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186)

3.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가?

이것에 대하여는 WCC의 ‘기독론’(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시고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한 논의)을 살펴보아야 한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본 신조는 아들이 시간 차원이 아니라 영원한 차원에서 아버지께로부터 기원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충만히 현존하지 않으실 것이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로서 시간 속에서 태어나신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를 매개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셨다’(begotten)고 하는 것은 시편 2:7절이 인용되어 있는 누가복음 3:22절과 히브리서 1:5절로부터 온 이미지이고, 이와 동일한 사상이 특별히 요한복음(예: 1:4, 18절과 3:16)에서 발견되는 ‘독특하게 태어나심’(only begotten) - 이것은 실제로 ‘유일무이한 분’이라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 이라는 용어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태어나심’이란 말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성적(connatural) 관계를 표현하고, 아버지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 낳으심은 어떤 특정 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 하는 말이다. ... (115)

신약성경에 의하면, 만물이 아들을 통하여 창조되었다(골 1:16; 히 1:2). 이것은 세상을 탕조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과 일치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또한 세상 창조에 참여하신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아들을 창조자라는 말로 인식하는바, 이 아들을 세계창조의 중보자(창 1:3 이하; 요 1:3)로 표현하였다. ... 모든 창조는 태초부터 아들 안에서 완성(엡 1:10)되도록 설계되었다. 아버지의 세계창조의 사랑은 이미 역사의 절정에서 일어날 영원한 아들의 성육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각 피조물이 각각 특별한 모양으로 마땅히 되어야 할 바를 요약해 주시는 바, 모든 창조세계의 영원한 모형인 로고스이시다. 그 어떤 피조물도 이 로고스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보면, 아들의 성육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완전히 명백해 진다.(119)

이상과 같은 기독론에 비추어 볼 때, “석가 그리스도, 공자 그리스도, 모택동 그리스도, 아프리카의 정령신앙 속에 있는 정령 그리스도” 등과 같은 비난과 비판은 언어도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질로 초월적인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지니신 분으로서 ‘하나님’에 다름 아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의 성육신을 통한 ‘내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사, 말구유에 나시며 성령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으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성령으로 갈릴리 사역을 수행하셨으며, 성령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성령으로 부활하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심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분이시다. 또한 그는 창조의 로고스요 창조세계 속에 내주하시는 로고스로서 모든 것을 완성해 가신다. 물론, 그분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시오 열방의 구세주로서 구속의 사역을 이룩하신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4. WCC의 교리헌장(the Basis)은 신앙고백들 및 신학의 다양성과 충돌하는가?

WCC는 교파로 말하면 340개가 넘고, 교인들 숫자로 보면 5억이 넘는 세계교회들의 에큐메니칼 가족으로서 정통 기독론(451년 칼케돈)과 정통 삼위일체론(381년 네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을 배경으로 하는 ‘교리헌장’(the Basis)을 공통분모로 하여, 코이노니아와 증언과 섬김을 위하여 다양한 신앙고백들과 다양한 신학들을 추구 한다.

세계교회협의회란 성경을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일체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의 공동 소명을 함께 성취하려고 하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2006년 포르트 알레그로의 WCC의 목적과 기능에서 WCC에 가입하고자 하는 교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증언”이 다음과 같은 WCC의 “규범들과 실천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규범들과 실천들”은 아래와 같다.

1. 교회들은 삶과 증언에 있어서 성경에 따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이 신앙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

2. 교회는 복음을 설교하고 복음의 가르침에 의하여 이해된 대로의 성례전들을 추구하는 사역(a ministry)을 유지한다.

3.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다른 교회들의 세례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4. 교회는 자신의 영역 밖에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인정하고 타 교회들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믿는다고 하는 깨달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한다.

5. 교회는 WCC의 다른 회원교회들 안에서 참 교회의 요소들을 인정한다. 비록 교회가 타 교회들을, “참되고 충만한 교회”로 인정을 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적어도 우리는 ‘교리헌장’과 ‘WCC의 목적과 기능’에서 WCC 회원교회들이 공유해야 하는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들을 발견한다. 적어도 WCC는 ‘신앙과 직제’ 전통의 다음과 같은 공식문서들에 나타난 ‘신앙’에 헌신하고 있다 하겠다. 즉, 1. ‘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제4차 세계대회: 제2분과)(1963) 2.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Text(1982). 3. Confessing the One Faith: An Ecumenical Explication of the Apostolic Faith as it is Confessed in 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381)(1991), 4. The Church: Towards A Common Vision(2012)이 그것이다. 하지만 WCC는 이상과 같은 모든 WCC 회원교회들이 공유해야 할 신앙고백과 신학을 에큐메니칼 운동의 길잡이요 반성의 전거로 보면서도 회원교회들의 다양한 신앙고백들과 신학들을 무시하지 안 는다. WCC는 모든 회원교파들의 신앙고백들과 신학들의 해체가 아니라 위에서 제시한 WCC의 신앙과 신학에 준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검토하고 비판하고 수정 보완할 것을 수정 보완하기를 바랄 것이다. 신앙과 직제의 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라고 선언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신학적인 요소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을 ‘신앙과 직제’운동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호주의 연합하는 교회’, ‘캐나다의 연합교회’, 그리고 ‘남인도 연합교회’ 등은 각각 연합의 조건과 결과로 작성된 연합신앙고백(union confessions)을 매우 충실하게 따르면서 WCC의 신앙과 신학을 추구한다.

 

5. 정현경은 성령을 거부하였는가?

1991년 캔버라 WCC의 전체 주제는 “성령이여 오소서, 전 창조세계를 다시 새롭게 하소서”였다. 성령초대의 기도로써 전 창조세계의 갱신을 기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부주제들도 성령으로 시작한다. 제1분과는 ‘생명의 부여자이시여, 당신의 창조세계를 지탱하소서!’였고, 제2분과는 ‘진리의 영이시여, 우리를 자유케 하소서!’였으며, 제3분과는 ‘일치의 영이시여, 당신의 백성을 화해시키소서!’였고, 제4분과는 ‘성령이시여, 우리를 개변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소서!’였다. 캔버라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적인 성령론에 바탕 하여 성령의 만유현존을 주장하였다.(S. Ⅰ. Ⅰ. A. 1)( S.Ⅰ. Ⅰ. A. 2)

그런데 위와 같이 성령을 전체 주제와 소주제들로 내세운 캔버라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주제에 대한 ‘기조연설’(keynote speech)을 하게 하였다. 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와 범 아프리카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인 파르테니오스(Parthenios)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정현경 박사였다. 그런데 정교회 사람은 정통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과 정통 성령론을 주장하였다.

WCC 총회들의 주제들은 그 동안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왔다. 그러나 호주 대륙에서 모이는 이번 총회에서 우리는 이번 대회의 주제가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 위격이신 성령이 될 것을 결의하였다.(S. Ⅱ. 2)

즉, 파르테니오스는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경세적 하나님께로 하향하는 삼위체론에 입각한 성령론을 주장한 것이다. 특히, 본 총회에서는 성령의 관계적 독립성 그리고 ‘영 그리스도론’이 부각되면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지배적 이었다. ‘영 그리스도론’이란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사, 말구유에 나시며 성령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으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으며, 성령으로 갈릴리 사역을 수행하셨고, 성령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성령으로 부활하신 분이시라고 하여, 창조와 역사에 보편적으로 현존하시고 사역하시는 창조자 하나님의 영(루아흐 야훼)이 이처럼 예수님의 모든 지상사역들에 선행하셨고, 동행하셨으며, 오늘날 창조와 역사 속에도 보편적으로 현존하시고 사역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오순절에 파송해 주신 기독론적 성령론(서방교회의 성령론)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현경은 ‘해방신학’, ‘민중 신학’, 그리고 ‘한(恨)의 신학’ 입장에서 혹은 ‘경험의 세계’로부터, 혹은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영 그리스도론’에 입각한 성령론’을 주장하다가, 정통 서방교회의 기독론적 성령론으로부터 너무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초혼 굿의 형식을 빌려서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되었으며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탄식과 울부짖음을 성령의 목소리와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자.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창 21:15-21)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착취를 당하였고 버림을 받은 이집트의 흑인 여성 하갈의 영혼이여!

... 중략 ...

예수 탄생 시 헤롯왕의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남자 아기들의 영혼이여!

잔 닥과 중세시기 동안 마녀심판으로 화형에 처해진 많은 다른 여성들의 영혼이여!

십자군 전쟁 때 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여!

식민주의 시대와 기독교 이방선교 시기 동안에 대량 살상된 토착민들의 영혼들이여!

홀로코스트 동안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영혼들이여!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원폭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 중략 ...

광주와 천안문광장과 리투아니아에서 탱크에 깔려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매일 같이 죽임을 당하는 아마존 우림의 영혼들이여!

인간의 물질과 금전에 대한 탐욕으로 강간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여 착취를 당하는 땅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피비린내 나는 걸프전에서 지금 죽어가고 있는 흙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십자가에서 고문을 당하셨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의 맏형 해방자 예수님의 영혼이여!

정현경 박사는 위의 서론에 이어서 3주제를 다루었다. “1. 한(恨)으로 가득 찬 이 영혼들과 함께 하는 성령의 땅에서. 2. 바벨의 영으로부터 오순절의 성령으로. 3. 회개에 대한 부름: 하나의 ‘생명의 정치적 경제’를 향하여”를 다루었는데, 각 주제의 끝 부분에서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과 위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영혼들의 부르짖음을 연결시켰다. 3번째 주제의 끝 부분만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에너지로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는 분열의 담들과 ‘죽음의 문화’를 무너트리십시다. 우리는 성령의 생명의 정치적 경제에 동참하여, 모든 생명체들과 연대하여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싸우고 JPIC를 위한 공동체들을 건설하십시다. 성령의 거친 바람이여 우리게 불오 오소서! 우리는 그녀를 영접하여, 그녀의 거친 삶의 리듬에 동참하십시다. 성령이여 오소서! 전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현경 박사의 성령론은 위에서 제시한 삼위일체론의 틀에서 벗어나 있고, 기독론에 정위되어 있지 않으며, 교회론 및 구원론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고, 그리고 종말론과도 무관하여,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하겠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녀의 성령론의 의도와 목적과 달리, ‘혼합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특히 WCC의 종교간 대화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주장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확실한 것은, WCC가 ‘혼합주의’(syncretism)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WCC는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언급한다.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 든 타종교들로부터 취해진 여러 가지 요소들을 자료로 제3의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 위험성인데(나이로비 WCC), 나이로비는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좀 더 넓게 본다며(제2부 C. 26), 두 가지 위험성을 덧붙인다. 하나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대화 상대방의 문화적인 셋 팅이나 타종교들과 타 이념들의 개념들과 용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너무 과도하게 나감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삶의 신빙성을 타협해 버리는 위험성이다.” 둘째 위험은 “하나의 살아있는 신앙을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써가 아니라 타 신앙 혹은 이념의 용어로써 해석할 때 생기는 위험부담이다.(제2부 C. 27) 이는 학문성과 대화의 원칙에 근거하여 볼 때 합당하지 않다. 이를 상론하면 아래와 같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 대한 어떤 다른 접근의 한 변형체라고 봄으로써 ‘혼합주의화’ 될 수 있고, 혹은 기독교 이외의 신앙이 기독교인들이 충만한 것으로 알고 있는 자신들의 신앙내용의 부분적인 이해에 불과하다고 할 때 역시 ‘혼합주의화’할 수 있다.(제2부 C. 27)

6.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는가? 모든 종교들 안에 구원이 있는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가정과 마을과 같은 로컬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 보전이 요청되는 국가와 나라들과 같은 글로벌 차원에서도 타종교들과 이념들과 문화의 문제들로 대화가 필요한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상호 신뢰와 각 참여자의 정체성의 온전성에 대한 존중에 기초한” 대화를 위하여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이고 둘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제2부 C. 17)고 하는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 문서는 ‘대화’를 통하여 복음이 ‘증언’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진실로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가지고 대화에 들어갈 때, 흔히 대화의 관계에서 신빙성 있는 증언을 위한 기회가 주어진다.”(제2부 C. 18)고 한다. 다시 말하면, 본 문서는 ‘대화’와 ‘증언’을 이원화하지 않고, 대화를 통하여 증언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힌두도인이든 각자가 “상호 신뢰와 각 참여자의 정체성의 온전성에 대한 신뢰”(a mutual trust and a respect of the integrity of each participant's identity)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를 포함하는 모든 종교들이 각각 자신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대화’에 임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바아르 성명은 제Ⅰ장 서론에 이어서 제Ⅱ장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 안에 현존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제Ⅲ장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이 포함되었고, 공관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역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을 포함한다고 하는 보편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제Ⅳ장은 성령께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 안에 현존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결국 본 문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 안에 실존하시고 계신 것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 1980년대까지의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와 ‘기독론적 배타성’을 넘어섰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종교간 대화 지침서’와 마찬가지로 바아르 성명은 종교간 대화의 출발점과 구원론의 원천을 철저히 기독교적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초월적인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역사와 창조 안에 내재하신다고 하는 확신은 타 종교들 자체가 구원의 원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이 구원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논한 기독론(제2항과 제3항)은 ‘불교, 힌두교, 아프리카의 정령신앙 등’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창조세계에게 제공되었다.”(탐바람 Ⅱ) 하지만,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대한 사명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멜보른, 188) 이것은 역설과 긴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떤 다른 구원의 길도 가리킬 수가 없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제약할 수는 없다.”(산 안토니오, Ⅳ. 26)에서 우리는 오직 ‘복음’을 통한 구원의 길을 확보하면서도, 복음전도(evangelism)와 타종교들과의 대화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하는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긴장에서 타 종교 그 자체가 구원을 제공하거나 그 안에 구원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복음’이 그것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온 인류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성육신) 모든 인류의 죄와 죽음을 한 몸에 걸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역시 그것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삼위일체론도 마찬 가지이다. 즉,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보편적으로 현존하시고 사역하신다고 하는 것 역시 그것의 특수성을 전제하는 보편성이다. 이는 어디 까지나 타 종교들과의 관계에서의 기독교의 자기이해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특수와 보편의 역설로서의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믿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직 그것을 믿지 않는다. 사실은, ‘살아있는 모든 종교들’이 나름대로 각자의 특수성에 근거한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종교적 다원성과 기독교의 자기이해?는 구원이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전통 기독론적이고 정통 삼위일체론적인 ‘복음’(본 문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환대에 집중하고 있지만)을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구원이란 하나님,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구원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내 맡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 자신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의 영원한 환대에 다름 아니다.

대체로 WCC의 구원론은 펠라기우스주의를 따르지 않고 2000년에 선포된 로마가톨릭교회 루터교 세계연맹의 ‘칭의 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1999.10.31)에 나타난 주장을 따르고 있다. 2002년엔 세계 감리교 역시 이 문건에 서명 날인하였고, 우리 개혁교회 역시 이에 대하여 전혀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다 하겠다. WCC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2005)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교회란 도덕적 성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음에 의존한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 두 공동체의 분열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던 바, 최근에 이 두 공동체가 자신들을 분열시킨 주 된 교리인 이신칭의 교리(혹은 의화교리)의 핵심적인 측면들에 대한 합의에 도달한 것은 교회일치를 위해서 중차대한 일이다. 도덕적인 헌신과 공동의 행동이 가능하고 심지어 교회의 삶과 존재가 지닌 본유적인 것으로 주장될 수 있는 것은 신앙과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Ⅳ.113)

 

7. WCC는 동성애 자체에 대하여 동의하는 결정을 했는가?

레위기 18:22절, 로마서 1:24-32절, 고전 6:9-10절, 그리고 창세기 18:20-21 및 19;4-5절에 근거하여 근본주의 개신교, 로마가톨릭교회, 그리고 동방정교회뿐만 아니라 침례교회, 루터교, 상당 부분의 장로교회와 감리교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추세이고, 캐나다 연합교회와 캐나다 성공회는 이를 관대하게 허용하고, 미국의 그리스도의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hrist in USA) 소속 개 교회들 및 미국장로교회(PCUSA) 소속 개 교회들 가운데 그것을 허용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는 그것을 법제화한 나라들도 있다. 우리는 앞에서 인용한 성경구절들보다도 앞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예스’(고후 1:18-20)로서 ‘복음전승’(the Gospel Tradition)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 즉, 로마서 5장과 고린도후서 12장이 선언하는 보편주의적 화해론과 에베소서 1장과 골로새서 1장과 계시록 21-22장이 고백하는 보편주의적 하나님 나라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이스라엘을 택정하셨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세계를 구원하시며, 결국 창조세계를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사랑하신 것처럼 동성애자도 사랑하실 것이다. 그의 나라는 소외되고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동성애 이슈는 히틀러에 의한 5십 만 명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집단 살해와 동성애자들의 안수례를 통한 성직수여로 인하여 ‘공적인 이슈’(public issue)로 부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바, 그것은 ‘인종차별’, ‘여성차별’, ‘장애인 차별’, ‘가나한 자들’, ‘난민들’, ‘이민자들’, 그리고 기타 ‘소외되고 주변 화된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같은 차원에서 동정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던 중, “1983년 제6차 WCC 총회가 비로소 동성애 사람들을 위래서 도처에 있는 교회들의 목양적 책임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교회들로 하여금 동성애 문제를 교회들 스스로 그리고 교회들 상호간에 검토하고 연구하라”고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로 “WCC 산하 교육 분과는 동성애에 관한 교회들의 공식적인 성명들과 성윤리에 대한 여러 다른 자료들을 수집하게 하였고, 하나의 연구지침서를 마련하여 교회들로 하여금 성과 인간관계에 관련된 교육과 목양적 돌봄과 변호 프로그램들을 만들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향후 ‘동성애’ 이슈가 교회 분열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는 한, 교회들의 가지적 일치를 추구하는 WCC는 그것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을 내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곧 온 인류와 창조세계 전체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교회들이 인구의 10%나 되는 저들은 물론, 기타 소외되고 주변 화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주변 화시키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8. WCC는 공산주의를 추구하는가?

1937년 옥스퍼드 ‘삶과 봉사’ 세계대회는 모든 정치형태와 경제이념들을 초월하는 교회의 인류사회에 대한 책임을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암스텔담 제1차 WCC 총회 역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를 비판하고 넘어서는 예언자적인 사회윤리의 입장 혹은 초월적이면서도 참여적인 사회윤리의 입장을 보였으니, 향후 WCC는 정치적 형태와 경제적 이념들을 넘어서서 JPSS와 JPIC 등 복음이 요청하고 불신자들도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 중간 공리들에 입각한 사회윤리의 실현을 추구해 왔다. 암스텔담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기독교회는 공산주의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모두를 거부해야만하고, 또 이러한 극단적 형태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인간을 벗어나게 해야한다. 이 둘 모두는 지킬 수 없는 약속들을 해 왔다.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경제정의를 강조하며 혁명이 완수된 후에는 자유가 자동적으로 올 것이라고 약속한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자유를 강조하면서 정의는 자유기업의 부산물로서 따라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것 역시 그 거짓이 들어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리하여 정의와 자유가 다른 한편을 파괴하지 못하게 하는 새롭고도 창의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임일 것이다.

그리하여 제Ⅲ분과에 의한즉, 암스테르담은 자본주의 나라이든, 공산주의 나라이든, 이 나라 안에 있는 국민과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촉구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세상에 참여하면서도 세상에 대하여 초월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이미 지적한 옥스퍼드 (1937)의 긴장을 계속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암스테르담의 입장이 1980년대 말 공산권의 붕괴에 의하여 돋보이는 동시에, 오늘 날 시장 경제 원리에 의하여 지구촌을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고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20세기 말의 현대인들의 모습을 반성케 한다 하겠다.

따라서 WCC는 결코 ‘용공주의’를 표방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저들의 비난과 중상모략은, 1990년 이전 ‘냉전구도’ 속에서 보수파 기독교권이 동구권 및 구 소비엣 체제 안의 교회들의 WCC 참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발하면서 시발되었다. 그리고 WCC가 북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 준 경제원조가 그 나라의 게릴라들에게로 흘러들어 갔다고 하는 소문으로 보수파 기독교는 WCC를 더욱 더 ‘용공’으로 매도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한국 보수파 개신교 역시 1990년 이전 ‘냉전구도’ 및 ‘반공이념 체제’하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용공’으로 몰았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WCC는 초이념적이면서 현실 참여적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한국 보수파 개신교는 결국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신봉하면서, 오직 ‘북한’을 염두에 둔 ‘반공이념에만 사로 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보수파 개신교 사람들은 한국전쟁이 터진지 9일 만에 열린 1950년 토론토 WCC 중앙 위원회의 결정을 알지 못한다.

WCC는 1949년에서 1954년 까지 여러 신학협의회들을 통하여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를 비판하였고, 교회들로 하여금 냉전체제를 반대할 것을 촉구하였다. 예컨대, 1949년 방콕에서 열린 WCC와 동 아시아 NCC들로 구성된 협의회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혁명“과 ”정의를 말살시키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구별하는 보고서를 내놓았고, 1949년 CCIA(the Commission of the Churches on the International Affairs)는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이것으로 인한 국제적 긴장”을 협의회의 제목으로 삼았다. 히로시마 이후 WCC의 주된 관심은 “군비축소”였고, 1949년 CCIA는 “수소폭탄에 대한 국제적 제어기구”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이 터진지 9일 만에 토론토에서 열린 WCC중앙 위원회는 “우리는 정의를 확장하고, 싸우고 있는 양대 세력의 화해를 시도함으로써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세계질서의 도구인 UN 으로 하여금 police action(국제평화질서 유지를 위한 국지적 군사행동)을 통하여 한국에 관여할 것을 공인하였다.” 그리고 WCC실행 위원회는 1951년 세계의 정치적 갈등 이면에는 심오한 경제문제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WCC의 태도와 행동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 중공은 WCC를 탈퇴하여, 향후 40년 동안 WCC와 별거해야만 했다(1991년 캔버라에서 다시 WCC 에 가입).

 

[2896호] 2013년 04월 19일 (금) 13:52:53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WCC 반대의 허구성을 해부한다 (시리즈)

'WCC=공산주의?' 발원지는 어디인가(上)

"WCC 반대의 허구성을 해부한다" ①  

 

1940년대 말 짜여진 극우 신학자의 '반WCC론' 지금까지 이어져

냉전상황에 있는 한국교회 안에 WCC 대한 흑색선전 일삼아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반대여론이 만들어진 역사는 WCC의 출범과 맥을 같이 한다. 특

히 WCC는 초창기부터 용공으로 호도됐던 아프고도 지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WCC가 창립됐던 1948년은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들불처럼 번질

때이고, 자유진영과의 첨예한 갈등으로 냉전이 시작되던 때였다. 한반도만 하더라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며, 9월 9일엔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닻을 올리면서

분단이 고착화 된다. 1950년 2월에는 미국 공화당 상원위원인 J.R. 메카시가 "국무성 안에 205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발 매카시즘이 전 세계를 뒤덮기에 이른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창립된 WCC도 필연적으로 이념논쟁의 한복판에 들어가게 된다. 1차

총회 때부터 동방정교회의 고대 4개 총주교구인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교회가 참석했고, 그리스정교회와 미국 정교회, 서부 유럽에 있는 러시아 총주교 대리교구가 참

석했다.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조자신(趙紫宸, T. C. Chao)이 이끄는 장로교와 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대표들을 파견한다.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1948년 암스테르담에 왔던 조자신은 1950년

7월 9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에서 한국전쟁을 북한의 남침으로 규정하고

유엔의 경찰행동을 지지했던 '한국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Statement on the Korean

Situation and World Order)에 불만을 제기하고 WCC 중앙위원을 사임한 인물이기도 하다.

WCC 내부에서조차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교회 간에 갈등이 컸던 것이 바로 초창기 WCC의 모

습이었다. 결국 이 같은 극심한 이념갈등 속에 출범한 WCC가 이후로 지금까지 안팎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일면 필연적인 일로 이해할 수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인위적인 외부요인이 추가되면서 WCC를 둘러싼 오해와 일방적인 비난이 증폭

된다. 평생을 WCC 반대에 헌신했던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yre)의 등장이 그것이다. 극우

반공주의자이자 근본주의 신학자인 그는 WCC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창립 총회를 가진다

는 소식을 듣고 추종자들을 규합해 재빨리 암스테르담으로 날아가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d)를 설립한다. 특히 칼 매킨타이어는 한국교회 분

열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서울장신대 정병준 교수는 "칼

매킨타이어는 한국교회에 근본주의 신학을 확장시켰고 재정지원을 통해 장로교 분열과 침례교

분열, 성결교 분열에 개입했고 교회 분리주의자들을 양산했다"면서, "냉전 상황에 있는 한국교회

안에 WCC에 대한 흑색선전을 일삼았다"고 지적했다.

 

분열사 뿐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 WCC에 대한 오해를 확산시킨 장본인 또한 칼 매킨타이어였

다. 당시 칼 매킨타이어는 WCC와 ICCC의 차이점을 비교한 소책자를 발행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현재 반WCC 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매킨타이어는 WCC

가 "궁극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하나의 에큐메니칼 교회를

세우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WCC가 슈퍼처치를 지향한다'는 오해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임원회와 중앙위원회 안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공산당에 가입한) 성직자와 비밀

경찰이 끼여 있고 △세계 사회주의를 적극적인 사회질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정부와 국제기

구에 압력을 행사하고 UN에 로비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처럼 '반WCC 이론'은 1940년대 말에 짜여진 '칼 매킨타이어 주장'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

지 원형 그대로를 유지한 채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구식 주장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장신대 박경수 교수(역사신

학)는 "교회는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도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며, 그 나라의 국민들도 분명 영혼구원의 대상들인 만큼 WCC 회

원 중에 공산주의 국가 교회들이 참여하고 있는 게 이상할 것이 없다"면서, "1950년대를 뒤흔들

던 메카시즘과 흐름을 같이 하는 칼 매킨타이어의 한물간 주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고 못박았다.

[2897호] 2013년 04월 26일 (금) 10:32:15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1950년 WCC, 북한의 남침 규탄 성명 발표

그러나 당시 정부, 진실 여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용공' 낙인

에반스톤 총회 참석하려던 '한경직 목사 여권 미발급' 일화 유명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둘러싼 용공 논란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지루한 꼬

리표다. 1951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즈음 우리나라 국회에서 한장의 성명서

가 발표된다. 국회의원 25명이 참여한 가운데 발표된 당시 성명서는 WCC가 용공단체이고 그

회원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도 용공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목사이

면서 2대 국회의원이었던 이규갑은 '기독교와 용공정책'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정계와 교계에

배표했다. 훗날 대한기독교반공위원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기독교를 배경으로 반공운동에 투신했

던 이규갑은 당시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국 기독교 각파와 각 단체가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해 용공정책을 주장하는 세계기독교연

합회(WCC)와 동아시아대회에 가맹연결된 것과 공산정책을 예찬하는, 또는 관장하고 있는 세계

기독교연합회로부터 구제금품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동 단체와 자매

관계를 가진 국제선교회(IMC)의 원조 받는 일도 진중한 사고를 경요(敬要)하와..."

결국 이규갑은 WCC와 현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전신이 되는 동아시아대회(EACC)까지

용공으로 매도하는 놀라운 주장을 펼쳤고, 국제선교협의회(IMC)가 보내는 원조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기독교연합회(NCC, 당시 총무:유호준)는 신속히 입장을 발

표했다. NCC 대변인은 "소책자를 보면 미국 내에서 WCC와 IMC와 대립해 싸우고 있는

ICCC에 소속한 모파의 모략에 의한 선전인 것 같다. 그나마도 미국 내의 어떤 잡지에 발표된

편파적인 문서를 재료로 미국 내 극소수의 보수주의자를 제외한 전 세계 150여 교파의 연합기

구인 WCC와 현재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를 위시한

각 교파 선교회의 세계적 연합체인 IMC를 일방적으로 용공정책을 주장하느니, 예찬하느니, 권

장하느니 하여 용공단체로 규명하는 것은 경거망동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1951년,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WCC를 반대한 이유는 뭘

까. 이 단서는 당시 NCC의 대변인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NCC는 대변인 발표를 통

해 ICCC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장신대 정병준 교수는 '세

계교회협의회를 향한 비판의 근거에 대한 역사적 고찰' 제하의 논문에서 한국 정부와 ICCC의 '

묘한 관계'에 대해 기술한다.

"이 사건의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측근 교계인사들이 있었다"고 밝힌 정 교수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 대통령은 송상석 목사와 이규갑 목사 등을 불러 세계교회협의회의 용공정책에 관

한 소책자를 주면서 한국교회도 세계교회의 용공적 움직임에 주목하고 대처해야 할 것을 요청

했다. 이규갑은 이 소책자를 번역해 배포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소책자를 이승만 대통령

에게 준 장본인이 바로 칼 매킨타이어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미국 선교사였던 치솜이 한

국 국회의원들의 WCC 비난 성명서를 번역해 (칼 매킨타이어가 만든 잡지) 크리스찬 비콘에

게재했다. 당시 치솜은 정부 방송국에서 정기적으로 30분 간 종교방송을 했고, 칼 매킨타이어

등이 내한해 이승만과 만난 후 정부 간행물에 그들의 활동을 보도했던 친 정부 선교사였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과 칼 매킨타이어 사이의 가교역할을 치솜 선교사가 했고 이 관계

의 연장선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칼 매킨타이어의 주장을 여과없이 한국에 확산시켰다는 것이

다.

하지만 미국의 반WCC 세력과 한국 정부 사이에 밀월이 시작되기 1년 전인 1950년 7월에 이

미 WCC는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을 통해 "북한군의 남침에 대처해 유엔이 한국에

서 경찰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 일로 WCC 안에서는 공산국가의 교회들과 자유진

영의 교회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고, 급기야 당시 중국교회 대표였던 조자신은 이 성명서

에 불만을 품고 WCC 중앙위원직을 사임해 버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WCC는 내부에서

심각한 갈등상황을 예상하고서도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정작 ICCC를

위시한 미국의 일부 보수세력들은 사실과 다른 주장들로 'WCC가 용공'이라고 매도했고 불행히

도 이런 거짓선전이 고스란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만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반WCC-친ICCC' 기조는 이후에도 수 차례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한경직 목사

여권 미발급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한국교회는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 2차 총

회 대표로 한경직 목사와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김현정 목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지만, 정부가

한 목사에게 여권을 발급하지 않아 결국 참석을 못하게 됐다. 반면 같은 해 7월 미국 필라델피

아에서 열린 ICCC 2차 대회에 참석을 하기 위해 여권을 신청한 고신 총회 소속 목사 4명은 무

사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WCC를 둘러싼 용공논란은 그 진실여부와는 전혀 관계없이 일방적인 낙인으로 지금까지 이어

져 오고 있다. 특히 역사가 흘러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모두 붕괴되면서 공산주의

가 실패한 이념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WCC를 용공으로 매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WCC에 대한 용공시비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2898호] 2013년 05월 02일 (목) 15:15:10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WCC 반대의 허구성을 해부한다" ③ 해묵은 논쟁, 종교혼합과 다원주의

"WCC 반대의 허구성을 해부한다" ③  

'다양성 속의 일치' WCC가 추구하는 중요 가치 중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만이 회원 자격 갖춰

이단 차단하기 위해 까다로운 회원 가입 절차 운영

'초혼제 퍼포먼스', '바아르 문서' WCC의 공식입장 아냐

 

'다양성 속의 일치'는 WCC가 지향하는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다. WCC는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말이나 구호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원교회들의 면면만 봐도 그 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WCC에는 전 세계 345개 회원교회들이 참여하고 있고 이중에는 러시아나 쿠바, 미얀마 등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부터 전통적인 이슬람 국가들인 이집트나 이란 시리아의 교회들까지도 함

께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WCC는 회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

주로 고백하는 교회'로 규정하고 있다. WCC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

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교제"라고 자신들을 소개하고 이를 명문화하고 있다. 이같은 신앙고백

을 하고 있는 WCC는 이단 등이 회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매우 까다

로운 회원가입 절차를 운영하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복음주의교회와 오순절교회, 개혁교회와 루터교회, 성공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협의체인 WCC를 둘러싼 오래된 오해들 중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종교혼

합주의'와 '다원주의'라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WCC를 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라고 비난

하게 된 근거는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 이후 전개된 '종교 간의 대화 프로그

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뉴델리 총회에서는 최초로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WCC가 3차 총회를 기점으로 '종교 간 대화'를 시작하게된 이유는 바로 당시 시대적인 상황이

종교들 사이에 평화적인 공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 종교가 평화적으로 공존하

기 위해서는 대화가 선결과제였던 것이었다. WCC는 즉시 대화를 시작했고 1968년 스웨덴 웁

살라에서 열렸던 WCC 4차 총회 때 타종교인 5명을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웁살라 총회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대화 사이의 분명한 선을 그었다.

 

4차 총회 보고서를 보면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인과 대화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성

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헌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

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종교인에 대한 진정한 기독교적인 접근은 인간적이며, 인격적이고, 적절

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규정했다. 결국 타종교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면서

'종교 간 대화'가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혹시 생

길지 모를 오해를 불식했다.

 

이후 WCC는 지속적인 종교 간 대화모임을 갖고 당초 목적인 종교 간 평화를 확산시키면서 동

시에 이 대화가 혼합주의나 다원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간다.

1970년 레바논의 아잘톤과 1974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각각 종교인 다자간 대화가 있었다. 이

듬해인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WCC 5차 총회에서는 종교 간 대화가 '종교간 에큐메

니즘'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는 입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9년에 WCC는 보다 강력하게 혼

합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당시 WCC는 'Guidelines on dialogue with people of living

Faiths and Ideologies'라는 문서에는 "첫째 위험은 기독교 메시지를 문화적 배경에 맞추어 해석

하려는 시도이고, 타종교의 이데올로기들에 접근할 때 기독교 신앙과 삶의 진정성을 타협할 정

도로까지 멀리 가는 것이다. 둘째 위험은 현존하는 종교를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지 않고 타종교

나 이데올로기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과 대화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하나님께 가는 여러 방법들 중에 한 변종으로 보이게 됨으로 혼합주의가 될 수 있다"

며 종교 간 대화을 할 때의 주의점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종교 간 대화는 늘 다원주의나 혼합주의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 1989년 WCC 세계선

교와 전도위원회가 산안토니오 대회에서 채택한 문서인 'Your will be done and Christ's way'

에 실린 한 문구가 논란을 야기한 적도 있었다. 당시 문서에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

른 구원의 길이 있다고 지적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어떠한 제

한을 둘 수 없다"고 기록했다. 이 문서가 발표된 뒤 특히 우리나라 복음주의자들은 일제히 '다원

주의 문서'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이랬다. 이 문구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타종교의 구원을 간접적으

로 열어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문구보다 더 큰 일이 1991년 열린 WCC 7차 캔버라 총회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를 주제로 열린 당시 총회에서 강연을 한 정현경 교수

(미국 유니온신학대)가 초혼제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오재식 선생의 책인 '나에게 꽃으로 다

가오는 현장'에는 그날의 분위기가 자세히 담겨있다. "1991년 2월 8일 총회 둘째 날 하얀 한복

차림으로 등장한 그(정현경)는 무대에 서서 신을 벗더니 총회장의 모든 참석자들에게 신을 벗으

라고 말한 뒤 종이를 태우는 등 그야말로 온몸으로 '초혼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총회장의 반

응은 완전히 둘로 갈렸다. 다원주의에 관심을 둔 그룹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대단하다고 박수갈

채를 보냈고, 한편에서는 '어디서 저런 무당 같은 사람을 데려왔느냐'고 날을 세웠다." 실제 당시

발제 직후 각국에서 온 정교회 대표들과 우리나라 총대들을 비롯한 각국의 많은 총대들이 자리

를 떠났다.

 

WCC 성령론에 직격탄을 날린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는 하지만 강연자의 입장이었을 뿐 WCC

가 초혼제가 담고 있는 의미를 지향한다거나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

는 WCC의 신학적 입장을 비판할 때 △개인 신학자들의 견해를 아무런 설명없이 WCC의 입장

으로 주장하지 말아야 하고 △WCC의 공식 입장인 '총회 보고서'나 '중앙위원회 보고서'에 입각

해 비판해야 하며 △비판하는 내용이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지 출처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등

세 가지의 기준을 제시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정 교수의 퍼포먼스나 WCC가 다원주의라고 공

격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바아르(Baar) 문서는 WCC의 공식입장이 될 수 없다.

 

성령을 주제로 열린 WCC 캔버라 총회에서 채택한 문서 중 제4분과 보고서에서는 WCC의 성

령론이 무엇인지 규정했다. "성령은 성삼위일체의 삶과 분리해서 이해될 수 없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성령은 그리스도시오 메시아며 세상의 구세주되시는 나사렛 예수를 가리킨다. 성령은 하

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힘을 주어 공동체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그들의 사역을 성

취하게 하신다. 성령은 성삼위일체의 본질 그 자체로서 거룩하시다. 성령은 이 세상의 다른 영

들과는 구분된다."고 증언했다.

 

반WCC 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WCC 공식입장이 다원주의가 아니라 해도 WCC 안에 다원주

의자들이 있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이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히 반WCC 운동

을 펼치고 있는 모 단체의 최초 지도부가 전원 다락방 소속 교회 교인들로 구성됐다고 해서 그

단체의 구성원 전원이 다락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결국 'WCC가 다원주의, 혹은 혼

합주의다'라는 비난은 한낱 비난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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