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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삼일운동과 한국기독교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5-04-06 오전 8:23:00
조회 49

삼일운동과 한국기독교

한국 교회는 3·1운동을 주도하며 우리나라와 함께했다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0 민주이념을 계승한다.” 이렇게 헌법에서 기록하고 있는 3·1운동이 올해로 106주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는 이 역사적인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16명이었을 정도다. 당시 한국 교회의 교인이 전 국민의 1%도 채 미치지 못하는 20만 명 정도의 교세를 가졌지만 3·1운동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일제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아 한때 15만 정도로 교세가 위축되었지만 2천만 조선인들에게 중요한 선교적 인식을 던져주었다. 기독교가 서양종교가 아니라 한국 민족의 애환을 함께하는 ‘민족종교’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면 인구의 1%도 되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40년이 안 되는 걸음마 수준의 기독교가 어떻게 민족독립운동을 이끄는 주도세력이 될 수 있었을까 의아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대목이다. 성경을 인위적으로 취사선택하면 진리의 영적 왜곡과 변질이 생기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이미지’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사회나 공동체에서 항상 ‘정의’로 표현된다. 사랑이 감정이나 정서를 분명히 포함하지만 공동체에서 그 사랑은 공의와 정의로 드러날 때 비로소 바른 사랑이 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민족의 고통에 기독교인이 적극 참여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정의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자.
 

구약성경에서 정의가 갖는 첫 번째 의미는 ‘공의’다

공의는 히브리어로 ‘체데크’, 영어로는 ‘Righteousness’다. 이는 관계적 개념을 갖는 용어인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바른 관계가 맺어졌을 때 이것을 ‘의’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며 자녀다. 그래서 공의로운 아버지 하나님은 택한 자녀를 떠나지 않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며 사랑한다. 이것이 ‘공의’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체데크)이니라”(신 6:25). 그리고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공의’는 이웃과의 관계도 포함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웃을 존중하고, 정직하게 행하며, 연약할 때 보살펴주는 것이 의로움, 곧 ‘체데크’다. 이런 흐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의인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의로워야 한다.


두 번째 의미는 ‘정의’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 영어로는 ‘Justice’다. 이는 공정한 판결, 공정한 판단을 뜻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에 대한 판단과 연결되어 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출 23:6). 이 말씀에 따르면 개인이나 사회가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에 억울하게 하면 ‘정의(미쉬파트)’가 깨진 것이다. 성경적으로 이를 더 확대하면 나그네, 억압당하는 자, 고통받는 자, 과부와 고아 같이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고 살펴주는 것이 ‘정의’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8) 하나님은 나그네, 고아, 과부와 같은 자를 늘 돌보신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그들을 돌볼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연약한 이들을 살피고 돌보셔서 이들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이고 하나님의 나라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이유이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체데크)와 공도(미쉬파트)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 중에 우리를 자녀 삼으신 이유는 공의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의로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살피고 돌보아 고난당하는 자, 압제당하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공의, 정의’에 담긴 사명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명(눅 4:18)이었고,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그대로 녹아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 교회가 3·1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을 이끈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안다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민족의 아픔에 참여하고, 불의한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 의해 고통받는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뛰어드는 신앙적 실천을 행했던 것이다. 
 

불의한 억압에 저항하는 신앙고백 속에서 정치와 종교의 장막이 걷어진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무저항, 비폭력 운동으로 3·1운동을 전개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였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정치를 행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역사학계에서 정사로 인정받지 않은 뉴라이트 역사관이 일제 강점기가 시장경제시대였다고 이를 미화한 것이다. 이 일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고 3·1운동을 이끌었던 한국기독교 신앙 선배들이 볼 때 어처구니없는 노릇일 것이다. 마치 구약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광야로 나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압제를 미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종교는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의 아픔에 깊이 천착해 들어간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다. 이에 대해 황홍렬 교수는(부산장신대) “3·1운동의 신앙유형은 복음주의도 에큐메니컬도 아니요, 두 진영을 넘어서서 하나 되는 통전적 신앙유형이다”라고 말했다. 교회가 진정 성경의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고백하고, 따를 때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영광을 받으신다. 새문안교회와 한국 교회가 이런 교회되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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