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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독교와 ‘역사의식’ (행 19:18~20)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3-04-02 오전 9:21:48
조회 544

기독교와 ‘역사의식’ (행 19:18~20)

복음은 시간과 공간에 뿌려진다
복음이 한 마을이나 도시나 국가에 들어와 뿌려질 때, 그것이 뿌려져서 뿌리를 내리는 토양이 있다. 복음이 허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복음은 항상 어떤 토양에 뿌려져서, 그 토양을 통해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가지를 뻗어서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다. 복음이 뿌리내리는 토양은 둘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시간이고, 하나는 공간이다. 첫째로, 복음은 시간 속에 뿌려진다. 복음 자체는 영원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하시다! 하지만 이 복음은 항상 시간 속에 뿌려진다. 그렇기에 그 시간 속에 있는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흐름을 간과할 수가 없다. 복음이 시작되는 역사의 흐름을 면밀히 주시하며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 열매를 기대할 때, 복음은 왕성한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가 공간이다. 즉 어떤 장소이다. 복음이 뿌리를 내리는 이 장소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고, 고유한 아픔과 문제가 있다. 복음은 이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면서, 이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과 문제를 철저히 끌어안고 해결해 주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게 된다.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장소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중요한 관심이 있다. 이것을 일컬어 ‘시대정신’이라 한다. 이 시대정신은 역사를 보는 안목에서 나온다. 한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읽어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혼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이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는 것은 역사를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의 큰 뜻과 부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사도 바울은 한 도시와 문화 속에 들어가서, 그 도시의 시대정신을 읽어내어 복음으로 답을 제시해 주게 되었을 때,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감격스럽게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이제 본격적으로 3차 전도 여행에 나선다. 그래서“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리라”(행 18:21) 했던 에베소로 돌아온다. 에베소시는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 4대 도시 중의 하나였다. 일찍부터 달의 신 아데미를 모시는 종교가 성행해서, 그 신전을 중심으로 다양한 마술과 주술, 점성술이 발달했다. 이곳에서 바울은 2년 동안 두란노서원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한다. 
그러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고, 바울이 말씀을 파고 들어간 내공이 그 자신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어서, 바울의 몸에서 난 물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
고 악귀도 나가는 기적이 일어난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술과 점성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서, 더 이상 자신들의 길흉화복을 마술과 점성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술과 점성에 관련된 책을 스스로 가져와서 불사른다. 일종의 문화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한 도시에 들어가서 그 도시의 문화 흐름을 바꾸고, 그 시대의 잘못된 악을 몰아내고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신인류(Neoanthropinae)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바울의 주도면밀하고, 목적의식적이고, 통합적인 가르침이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 않은가? 왜 이런 문화대변혁이 1, 2차 전도여행 때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1, 2차 전도여행에서는 영혼구령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만들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는 일이 전부였다. 그런데 왜 3차 전도여행에서 단순히 이 에베소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복음으로 변혁되어서 도시 사람 전체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으로 들끓게 되는가? 바울이 이제 복음으로 그 복음이 뿌려지는 토양의 시대정신을 붙들고 씨름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경륜까지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앙과 신학이 원숙기에 이른 것이다. 바울이 보기에 에베소시에서 마술과 주술과 점성은 문화를 타고 흐르는 시대의 악이었다. 이것을 그냥 두는 것은 하나님 뜻도 아니요, 악한 토양을 그대로 두는 것이기에 이 토양에 뿌리내리는 복음을 위해서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점성과 주술과 마술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얼마나 미신적인 것인지를 집중해서 가르쳤을 것이다. 점성과 마술에 대해 연구도 했을 것이다. 복음이 뿌리내리는 시대의 문제를 붙잡고 씨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1cm라도 확장되는 일에 인생을 드려야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현실에 함몰되어서도 안 된다. 현실을 그냥 따라가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 만일 그렇게 산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1cm라도 더 확장되는 일에 인생을 드려야 한다. 그게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다. 교회나 성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정신의 흐름과 복음이 궤적을 함께 하도록 하면서 교회는 구원사에서 거대한 흐름을 얻게 된다. 구한말의 선교사들이 조선의 근대화라는 시대정신을 읽어내서, 교회의 활로를 이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방향과 함께한 것이 이런 맥락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시대정신은 당연히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식이었다. 이 시대정신을 정확히 읽어낸 사람이 새문안교회 창립자 언더우드 선교사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이 카스라/테프트 협약을 맺어서 조선의 지배권은 일본이 갖고, 필리핀과 태평양의 지배권은 미국이 갖는다는 분할 통치의 원칙을 세운다. 그리고 이때부터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은 이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보고, 그때까지 애국계몽을 고취시키던 설교나 언행을 접게 된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죽는 날까지 조선의 시대정신을 염두에 두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반드시 해방의 좋은 날이 올 것이니 낙심하면 안 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1916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일본이 방해해서 그의 비석을 세울 자리를 한동안 못 찾을 정도였겠는가? 역사의식에서 나온 시대정신이다. 사실 성경에는 이미 만민의 자유와 평등과 인권에 대한 보편가치가 들어 있다. 그것에 입각해서 언더우드는 조선의 시대정신을 더 명료히 한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민족기독교로 백성들 사이에서 지분을 갖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정신을 이어간 몸부림 덕분이었다. 복음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면, 그 시대의 가장 큰 고통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복음으로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순간, 이미 그는 시대의 문제를 건드려 새로운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오늘 이 시대의 가장 큰 악이 무엇인가? 에베소시의 주술과 점성과 마술에 해당하는 정신이 오늘날은 무엇인가? 그것은 맘모니즘(mammonism)이다. 상업주의와 물질주의 이데올로기다.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고, 모든 것을 경제효용으로 판단하는 이데올로기다.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물질주의 문명의 흐름에서 가장 취약한 사회가 우리 한국사회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회가 이런 세상의 모습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이 말은 재물은 하나님에 비견될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만큼이나 사람을 매혹해서 섬김을 받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이 재물의 위력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문명은 이 재물을 정말 왕처럼 섬기는 문명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 문명
의 흐름에 대해 예언자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 시대정신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사실은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누군가는 자기들 문제를 말해주기를 원한다. 누군가는 이대로 가면 “다 같이 망한다고! 안 된다”고 말해 주기를 바란다. 대안을 말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이기를 바라고, 종교이기를 바란다. 에베소의 바울은 이런 면에서, 에베소라는 세상에 분명히 대안을 제시했다. 점성과 주술과 마술보다 더 탁월하게 한 인간의 운명을 이끌어가는 힘이 있으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말씀한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시대정신을 잘 분별하며, 물질주의와 상업주의 이데올로기에 포로가 되지 말고, 생명을 살리는 삶을 추구하길 바란다. 언더우드의 선교정신을 따라, 복음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신실하게 추구하는 새문안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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