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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이 진정 복음(good news)인 이유 (1) - 요한복음의 신앙관을 중심으로 -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0-07-07 오전 9:09:12
조회 423

복음이 진정 복음(good news)인 이유 (1) - 요한복음의 신앙관을 중심으로 -

기독교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단연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 주장한다. 여기에는 종교는 사람이 자신들의 심리적 위안을 위해 만든 인공물인 반면에,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가공품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선물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성도들을 보면 한국 교회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기독교가 종교가 아닌 생명이라 단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상 그 신앙생활의 속사정으로 들어가면 복음의 풍요함과 생명력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기 보다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안타까운 경우를 보게 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를 쉽게 정죄하는가? 복음의 기쁨으로부터 나온 실천이 아닌 도덕적 의무, 심리적 두려움, 혹은 현세적 복에 대한 기대심리에서 헌신하고 있는가? 엄청나게 헌신하면서도 늘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하여 마음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지금 종교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런 성도를 많이 목격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특수한 경험이길 바란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것이 한국 교회 성도들 안에 만연해 있는 영적 현상이라면 아마도 기독교 신앙이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확신 또한 그렇게 얘기해야 한다고 주입받은 것이지, 진정한 신앙의 진솔한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는 반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듯이, 교회는 끊임없이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 교회도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명목적이고 생기를 잃은 복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신앙생활의 한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좋은 소식(good news)을 받고, 체화하고, 경험하고, 누려 전파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도 자신과 교회가 살아나는 길이다.

이런 요구를 반영하듯 21세기 성서신학계에서는 요한복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한때는 제4복음, 영적복음이라 하여 공관복음과 결이 다른 영지주의적 복음으로 폄하되었던 요한복음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안에는 복음이 주는 생명력 그 자체로 가득차 있다. 이미 사도 요한은 요 20:31절에서 요한복음의 대주제를 말씀하셨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능력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 요한복음이 가는 길이다. 요 10:10절에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의 대주제가 복음, 즉 좋은 소식이요, 그 복음의 내용이 ‘생명’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시는 복음의 생명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각자의 생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풍성한 삶으로 살도록 해주는가?

첫째,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본질적으로 고난이 아니라 ‘잔치에의 초대’ 이다. 기독교인은 흔히 생각하기를 예수를 따르는 삶은 십자가와 고난을 통한 자기부정의 길이라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도 당신을 따르는 자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의 기자가 보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인생관을 소개한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고행길이 아니라 행복한 여정(happy journey)이며, 광야길이 아니라 축제가 그 기저를 이룬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단을 형성하시고 난 후, 제자들을 당신 사역의 현장으로 초대하신다. 그런데, 그 첫 장소가 가나의 혼인잔치이다. 왜 첫 사역의 장소가 광야도 아니고 바리새인과의 논쟁의 현장도 아니라 하필 ‘잔치’ 인가? 잔뜩 긴장하여 고행과 자기 훈련의 치열한 싸움을 예상하고 있는 제자 - 혹은 요한복음 의 독자 - 에게 요한은 예수를 따르는 걸음의 본질을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신명난 축제요, 예수와 함께 하는 행복한 여행이다. 기독교인의 삶의 본질은 육체의 욕심,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의 포로됨과 억압됨으로부터 해방되어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는 자유함으
로 초대받는 위대한 삶이다. 물론 이 영적 잔치속에도 눈물, 아픔, 고난, 좌절 등 소위 인간이 이 땅에서 겪는 실질적 고통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절대로 성도들을 삼키지 못한다. 적어도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부지불식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경우가 있다. 뭔 말인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죄와 죽음과 어둠의 권세를 뚫고 부활하신 분이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부활의 능력을 신뢰하며, 자기 안에 아직 엄존하는 죄를 인정하되 그 죄에 짓눌리지 않고 찬양으로 맞서 싸우며, 세상의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기쁨으로 추구해 간다. 그 신앙이 밝고, 경쾌하며, 적극적이다.
반면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고 사는 성도들이 있다. 그는 고난받기를 즐겨하며, 타자를 위해 희생하며, 교회를 위해 순종한다. 그런데 그 안에 기쁨이 없고 오히려 순종의 고통이 그를 누르는 듯하다. 그래서 신앙이 어둡고, 둔중하며, 심지어 비장하기까지 하다. 제사장의 영을 소유하고 있을지 모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는 아니다. 이런 경우 예수를 따르는 삶은 고난의 십자가이지 결코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여정이 아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함께받는 고난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활을 바라보는 고난이기에, 여기에는 소망이 충만하다. 스스로에게 되물어 봐야 한다. “나는 진정으로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신앙의 걸음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소개하고 싶은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갈까봐 염려가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이 신앙의 걸음 속에 있는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지금 이 신앙의 잔치에 그를 진정 기쁜 마음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보다는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의 주님을 더욱 모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신앙의 삶이 주는 참된 기쁨이 없으며 그 삶은 종교적 삶이 된다.

요한복음의 세계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누리는 인생관을 소개한다. 신앙길은 가시밭길이 아니라 축제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지는 주님의 동산이다. 물론 가시밭도 있고, 광야도 있으나 그 순간들 또한 부활의 빛 속에 있다.
원수는 여우같이 그 동산을 헤집어 어지럽힐수는 있으나 절대 망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그러므로 잃을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놓칠까봐 조바심할 필요가 없다. 철봉에서 떨어질까봐 조바심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잔치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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