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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이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교회를 만들자!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19-07-07 오전 8:47:41
조회 1520

복음이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교회를 만들자!

교회에 나오면 사회에서 잘 쓰지 않는 말들을 듣게 된다. 이른바 종교용어이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의 하나가 ‘복음’이라는 단어이다. 복음, 우리 말로는 복된 소식, 영어로는 Good news이다. 원래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이라 하여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는 천사라는 뜻이다.

신약성서시대에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목숨을 걸고 전하려고 했던 것이요, 교회의 토대와 기초가 되며 기둥과 지붕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복음이다. 그런데 그 복음, 즉 기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의외로 대답이 빈곤하거나 비성경적인 답변을 내어놓는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 이제 내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내 죄가 용서받아 나는 죽어 영벌에 처해지지 않고 천국에서 영생을 얻게 된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즉, 내세에서의 천국을 일컬어 복음이라 말한다. 한국 교회는 지난 130여 년 동안 이것을 복음이라 믿어왔다. 죽음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사후천국은 분명히 복음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하려 했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그 복음, 사도 바울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던 그 ‘복음’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도들에게 복음은 죽어서 일어날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설교자나 신학자는 “예수께서 내 죄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모진 고통을 당하신 후에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 우리도 우리 주님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다른 이들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죽어서 천국가는 것으로 복음을 이해한 사람보다 수준높은 신앙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즉, 복음을 내세에 일어나는 일로 만들어 버려 현실에서 바르게 살지못하게 만드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신앙이 뭔가 사람의 삶에 유익이 되고 건전한 삶을 살아가는 지침이 되게 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어떤 바람직한 삶에 대한 권고나 충고가 복음은 아니다. 만일 복음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바리새적 율법주의나 행동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이다. 사후천국론이 복음의 축소라면 복음을 건전한 삶에 대한 지침으로 인식하는 것은 더욱 심한 복음의 왜곡이다.

축소했다는 말이 복음이 가진 보다 크고, 심오하며, 놀라운 소식을 죽어 천국에 가는 내세를 위한 생명보험 정도로 가져갔다는 말이라면, 복음을 왜곡했다는 말은 사실은 복음이 아닌 것이 복음으로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당연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사셨던 모범을 따라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하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은 아니요 복음의 본질은 더욱 아니다. 경건한 삶은 복음 즉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들은 사람이 시간이 지나 예수께 보이는 응답이요 반응이지 복음 자체는아닌 것이다.

어떤 주장이 복음이 된다는 것은 해당자에게 춤을 출 정도의 환희와 감격,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마치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난 자녀가 교통사고가 나 죽은 줄 알았는데, 그 자녀가 사실은 그 차를 놓쳐 다른 차를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내게 일어나는 일과 같다. 그것이 복음이다.

초대교회의 복음, 즉 성경적 복음은 이런 면에서 대단히 현세적이었다. 복음은 하나님이 만드신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피조세계 전체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예수를 실제로 만났을 때, 그것은 단순히 바울이 회심을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든지 하는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예수가 실제 육체로 부활했다는 사실은 그가 곧 구약이 예고했던 그 메시야라는 의미를 가졌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에게 복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갈릴리의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실제로 살리셨다! 하나님이 이 예수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이제 그 예수는 단순히 우리 영혼의 주나 내면의 주님이 아니라 메시야 즉 세상의 왕이 되셨다……이 왕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며, 그 때에 그 분의 통치는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사도들이 외친 복음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예수가 왕이요, 예수가 메시야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은 영적, 심리적, 개인적, 공동체적 의미를 지녔고 심지어는 정치적, 우주적 함의를 포괄했다. 인생관을 바꿀 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우주관을 재형성했다. 아주 단순하지만 실제로 이를 선포하는 사도들의 이 복음을 듣는 자들의 인생전체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현대의 지성적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명제나 조항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이 단순한 복음을 살아있는 인격으로 받아들였다.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전인의 완전한 회개와 중생이 연이어졌다
.
더욱 놀라운 일이 그 뒤에 일어났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사도 바울이 이 복음을 선포하는 현장에서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도망하는 등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단순, 명료하며 투박하기까지 한 복음이 진리이며, 이 복음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임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들이었다. 이 복음은 진정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초대교회는 이 복음의 능력에 힘입어 적은 숫자로 시작했으나 들불처럼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이 복음을 얼마나 축소하고 왜곡해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루돌프 불트만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는 ‘비신화화’의 미명아래, 복음을 심리적 영역의 평안과 위로로 축소했다. 도덕주의자들은 이 복음이 어리석은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충고나 권면의 조항으로 바꾸어 버렸다. 카리스마적 치유운동을 회복하자는 뜻이 아니다. 한 사람과 공동체의 삶에서 예수가 진정으로왕이 되고 주권자가 되게 하며, 이것이 가감없이 선포되고 또한 받아들여질 때에는 성경의 사도행전에나 나올법한 복음의 능력이 실제로 책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함이다.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또한 앞으로도 진정한 교회의 회복, 교회의 갱신은 복음의 회복이요 갱신이다. 우리 새문안교회의 여섯 번째 예배당에서 “예수가 왕이시다!”라는 단순명료한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고 또 수용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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