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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심판을 잊어버린 세계관을 경계하자!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5-06-01 오후 6:37:17
조회 36

심판을 잊어버린 세계관을 경계하자!

현대 교회에서 교역자가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특히 지옥의 존재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강대상에서 심판을 말하는 것을 멈추자 사회 한복판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 사회가 부도덕과 불의의 용광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어졌다. 오히려 죄악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고 물질적으로 더 잘살게 된다면, 그것이 지혜로운 처신이요 심지어 정당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은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우리의 정신과 도덕은 더욱 황폐해지고 말았다.

‘값싼 은혜’를 말한 교회가 원인이다

사회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는 책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 원인이 교회가 선포하는 ‘값싼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오늘날 교회의 원수는 값싼 은혜이다. 그것은 헐값에 팔리는 용서요 헐값에 팔리는 위로이며 헐값에 팔아버린 사죄요 헐값에 팔린 성찬이다. 이런 교회가 있는 세상에서 죄는 헐값 취급을 받는다.” 삶의 기준과 잣대를 제시하고 인간이 마땅히 살아갈 길을 알려 주어야 하는 교회가 오히려 값싼 은혜에 빠져 헐값에 팔리는 용서를 남발하니, 사회도 죄를 헐값 취급하여 죄의식도 양심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교회가 심판을 말하지 않으니 세상이 심판을 알 리가 없다. 교회는 이제 예수를 믿으면 마음 놓고 죄를 짓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죄를 지어도 용서를 빌면 모든 것이 용서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값싼 은혜로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고전 15장 부활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류사의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부활이 정말 역사적 사실이라면 모든 죽은 자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무덤이 끝이 아니고 그들은 반드시 부활한다. 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현세에 대해 엄청난 경각심을 가져다준다. 내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부활 이후 심판의 결과를 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세상이 가는 길이다.

지옥과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죽은 뒤에 반드시 부활하고 천국과 지옥의 양 갈림길에 서게 된다. 예수님께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자신이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어디로 갈지를 인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대해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고 말씀하셨다. 썩은 살을 먹고 사는 구더기가 죽지 않는다는 것은 살이 계속 돋아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이 계속 나니 불도 꺼지지 않는 것이다. 너무나 끔찍한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지옥을 우리에게 사진을 찍듯 보여주신다. 왜냐하면 온갖 짓는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이 지옥과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가 얼마나 두려운지 보여주시는 것이다. 당연히 선한 삶은 위로와 보상이 반드시 뒤따른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너무 많이 말씀하셨는데, 기독교는 어느 순간부터 이 심판과 지옥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사람들에게 바르게 가르치지 않았다. 교회가 사람들의 욕구에 투항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아무 성찰 없이 마구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이는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다는 값싼 은혜 때문이다.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시 말씀 고전 15장으로 돌아가 보자.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고전 15:32). 여기서 ‘맹수’는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받는 극심한 반대를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 맹수들에 대해 ‘사람의 방법’으로 더불어 싸우지 않았다. 왜 바울은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웠을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하나님 앞에서 ‘이 순간 전체’가 계산대에 올라가 평가받는 날이 오는 것을 꿰뚫어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부활은 믿어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싸우고 있지 않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고 당당하게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람의 방법으로 싸우고 있다. 정말 죽은 자의 심판을 믿는다면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못할 것이다. 서로를 음해하고 공격하고 거짓말하고도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면서도 죄책감이 없는 것은 천국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오늘날, 교회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16). 그리스도인은 세상 한복판에서 양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맹수와 같은 세상에 대항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양으로 사는 길이다. 선하고 연약해 보이는 양,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결국 세상을 이기셨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주님을 진정으로 믿어야 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대박해의 시기였던 초대교회 당시,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고백이었다. 오늘날의 값싼 고백과는 그 깊이가 하늘과 땅 차이다. 오늘날은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고 왕 되시고 모든 것 되시는 결단이 없는 고백도 있다. 이는 공짜로 은총을 얻으려고 믿는 것과 같다.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다. 여기에는 구원의 효력이 있을 수 없다. 그가 믿는다 하지만 진정 주님을 주인, 큐리오스(Κύριος, 主)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심판은 반드시 있다! 천국과 지옥을 판단 받는 날은 반드시 온다. 내 삶의 내용이 낱낱이 드러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고생하면서도 선하게 산 삶이 위로와 상을 받는 순간도 오고, 가려놓았던 죄악이 드러나는 순간도 온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한다.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심판을 잊어버린 이 세대를 따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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