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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훈련의 신학 (2) - 생명과 치유와 회복을 향하여 –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19-03-03 오전 11:52:39
조회 1682

성서에서 살펴보는 다뤄지지 않은 죄의 영역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의 타락과정이 그림 같은 이야기로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 타락과 연이은 연쇄적 작용을 살펴보면, 현재의 법정적죄와 구원 이해로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기 어려운 필연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창세기 3장은 죄가 사람에게 들어오고 난 후, 즉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후 “눈이 밝아졌다(opened, enlightened)”고 한다. 소위 계몽화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다”고 기록한다(창 3:7). 그래서,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창 3:7). 어떻게 이전에는 벗은 것을 몰랐는데 이제 자신들이 벗은 것을 알게 되었겠는가? 에고(ego)가 이들 안에 생긴 것이다.
여기서 에고는 하나님 없는 자아를 말하며, 이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는 무신론적 관점이 형성된다. 이 에고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이제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만든다(창 3:8).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니 아담은 대답한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 이전에는 자신 안에 찾아볼 수 없었던 두려움이 찾아온다. 부끄러움을 알아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리는 수치심이 들어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떠넘기는 인간과 인간 간의 소외와 분리현상이 일어난다.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면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는 것을 보고 가인은 질투심으로 결국 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살인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단절로 인해 생긴 인간 안의 심리적 연쇄반응 – 수치심, 두려움, 소외의식, 질투심 등 – 과 적대적 관계를 그림처럼 펼쳐 보여준다.
성경은 인간 안의 온갖 내면적/심리적 문제들이 인간 안에 내재했던 것이 아니라, 죄가 인간 안에 들어오면서 생긴 결과적 현상임을 말해준다. 이 말씀들이 단순히 하나의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 안에 시작된 죄의 현상과 그 결과를 보여주는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죄악을 다루는데 있어 법정적인 죄의 이해와 용서의 교리, 그리고 하나님과의 법적 관계의 회복만으로는 왜 구원이 충분하지 않은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과의 객관적 관계의 회복은 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주는 데는 충분할지 모르나, 관계의 단절로 인해 찾아온 인간 내면의 연쇄적 질병 – 탐심, 탐식, 음욕, 슬픔, 분노, 나태, 헛된 영광, 교만 등의 여덟 가지 죄의 양태, 심리적 질병- 에 대해서는 결정적 해결점을 찾아주지 못한다.
죄책으로부터의 해방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치유(healing)와 회복으로서의 구원(salvation)

선교단체의 사영리론을 중심으로 구원을 이해해 온 한국 교회는 그동안 구속과 구원을 혼동하여 이해해 왔다. 죄책으로부터의 용서와 해방, 영생에 대한 확신은 엄격히 말하면 구원이라기 보다는 구속(redemption)이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은 헬라어로 ‘soteria’이며, 여기에서 영어 ‘salvation’이 나오게 되었다. ‘Soteria’의 어원적 뜻은 치유(healing)와 회복(recovery)이다. 즉, 엄격한 의미에서 구원은 죄의 용서로부터 시작되어, 창세기 3장에서 펼쳐친 인간 안의 모든 심리적, 영적 질병
과 내적 증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전 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물론 구원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과 성도의 가족적 관계성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다. 구속과 죄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의 위대한 구원의 지평이 죄사함의 은총과 면책의 교리로 환원되거나 축소되어서도 안된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씀한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무엇이 남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인가? 구속(redemption) 곧 죄사함 (혹은, 받는 구원)은 이루었지만, 치유와 회복을 통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구원(salvation)은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성화하는 은총이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필요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죄사함의 은총을 받은 성도 자신의 치유와 회복과정의 중요성은 간과한 채,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걸맞는 행동 혹은 도덕과 윤리적 삶의 차원으로 성도를 압박해 왔다.
문제는, 죄가 인간 내면에 배태한 온갖 질병적 증상과 심리적 증상은 전혀 다루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 채 성도를 삶의 현장으로 떠밀어 냄으로써, 그리스도인 안에 예상치 못한 실족과 좌절이 빚어진다는 사실이다. 즉, “용서받고 은혜 받았으니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라!”라고 명령받지만, 이들 안에 아직 다뤄지지 않았으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져야 할 내면적 질병들로 인해 성도는 스스로의 부조리와 모순 – 극복되지 않은 온갖 죄의 증상 – 때문에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가진 구원의 능력을 의심하여 교회를 떠나게 된다.

행복한 여정(happy journey)으로서의 훈련

바로 여기서 영적 훈련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영적 훈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정해진 코스나 교육과정에 자신을 밀어 넣어 자기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연마나 자기수련이 아니다.
훈련은, 우리 안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내재되어 있는 온갖 죄의 증상, 내면의 질병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성령의 은총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내면의 문제가 드러나고, 그것의 실체가 밝혀지며, 인간을 오랫동안 자기 한계와 좌절에 묶어놓았던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는 과정이다. 이런 면에서, 영적인 훈련은 고행이 아니라 행복한 여정 (happy journey)이다.

나가는 말

이 훈련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해 성도에게 제시될 수 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이다. 둘째는,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요 10:10)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교회를 통해서이다.
필자는,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는 현대 사회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교회공동체가 제공하는 다양한 양육과 훈련 프로그램 및 말씀교제모임을 통해 훈련을 받는 것이 필수라 확신한다. 그렇게 할 때 영적 치유와 회복을 통해 생명의 삶을 경험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 성전 시대에 우리 새문안공동체는 온 교우가 아름다운 훈련공동체를 이뤄,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명을 얻고, 누리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거칠게 밀려오는 세속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을 거슬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견고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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