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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설교론 (3) – 진정한 성경적 설교를 좇아서!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18-06-03 오전 10:08:31
조회 2319

나의 설교론 (3) – 진정한 성경적 설교를 좇아서!

여태까지 나는 설교자의 '영성'에 대해 얘기했다. 설교자가 자기만의 설교세계를 추구한다든지, <설교>와 <삶>과 <기도>의 삼위일체를 위해 치열하게 구도자적 싸움을 전개한다든지 하는 것은 설교자의 영성, 즉 하나님 앞에서 선 설교자로서 어떻게 그 분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은 설교의 기초이며, 바로 이 기초에서 설교라는 샘물이 흘러나온다. 그러면, 설교의 주제와 내용은 이제 어떠해야, 성도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며, 그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게 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 되는 사명을 감당하게 도와드릴 수 있는가?
 
나는 개신교 목회자로서, 단연코 설교가 성경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성경적'이라 할 때는 몇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설교가 성경적이라 함은, 설교의 주제가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주제가 성경적인가?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삶, 메시지, 고난, 죽음, 부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나라’를 얘기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만이 성도들을 깨우고, 살리고, 자라게 하고, 온전케 한다. 모든 설교는 예수님을 지시(point out)해야 한다. 그것도 부활만이 아닌 그 분의 모든 삶, 인격, 메시지를 모두 성도들의 양식으로 가져가야, 성도들이 균형 있게 자라며 성숙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경을 ‘예수께서 누워계신 구유’라 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찾아낼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열심히 성경의 전거를 갖다 대고 말하지만, 그 안에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삶과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는 설교, 그 분이 그토록 갈망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지 않는 설교는 성경적이라 말할 수 없다. 성경적 주제와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극복할 것이 네 가지 있다. 1) ‘치병기복신앙’과 ‘번영신앙’ (prosperity gospel)과 ‘신비주의’이다. 먼저, 한국교회의 설교주제에 ‘치병기복신앙’이 많다. 그런데, 이 기복신앙을 외치는 설교를 들어보면, 대단히 성경의 내용을 많이 끌고 나온다. 어떤 경우는, 설교의 2/3 이상이 성경에서 그 근거를 가져온다. 자기주장을 방어하기 위해 성경에서 많은 구절을 인용한다 하여 그것이 성경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2) ‘번영신앙’ (prosperity gospel)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번영(flourishing)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번영의 내용은 세상에서 얘기하는 내용과는 다르다. 만일 그 내용이 세상이 얘기하는 것과 같았다면, 예수님은 자기를 왕 삼으려는 자들을 뒤로 하고, 산으로 가시지도 않았을 것이요, 인기가 절정이실 때, 십자가를 향해 가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번영을 얘기하더라도 그 내용이 성경적이어야 한다. 3) 성도의 신앙이 ‘이적’ ‘신비주의’ 혹은 ‘주술과 마술’에 근거하면 안 된다. 기독교 신앙은 신비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니다. 신앙이 구원받은 이성과 성령께서 이끄시는 영적 분별의 원리에 입각해야 건전하게 자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이 될 수 있다. ‘뭘 보았다든지’ ‘뭘 느꼈다든지’ ‘뭐가 들렸다든지’ 하는 영적 경험은 조심에 또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오해말자. 이것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주된 분별의 도구가, 성경적 해석에 뒤따른 보조적 도구가 되어야 성경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의 주제가 정말 주님의 말씀, 자기를 낮추고 섬기신 삶의 내용, 고난, 죽음, 부활의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체크해야 한다. 4) 설교가 정치이념화 하거나 특정 정치집단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성경적인 설교는 한 국가공동체의 정치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모든 정치 문제를 하나님 나라의 전망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설교가 성경적인 설교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치적 소신이 특정한 정파나 정당의 이념을 지지하거나 배격하는데 있어 성서와의 치열한 대화와 해석적 작업이 없이 진행될 때, 이 순간 설교는 이데올로기화 되어진다. 설교는 하나님과 그 분의 나라를 온전히 드러내 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성경 66권 전체를 두루 다루는 설교여야 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자기 신앙으로 가져갈 수 있는 균형이 잡혀야 성경적인 설교이다. 자기만의 설교세계를 추구하더라도, 그 텍스트는 성경전체에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성경책만 선호하면 안된다. 흔히 보면, 특정 복음에 치우치는 경우가 있다.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만 다룬다든지, 요한의 생명의 복음만 중요시한다든지, 혹은 사회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경우 예언서의 정의만 다룬다든지 하면, 이는 자기만의 설교라기보다는 '편향된 설교'이다. 최근에 어느 목사님이 은퇴하시면서 “70-80년대 독재정권의 시절에 침묵한 것과, 예언자적 메시지를 던지지 않은 것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덜 가진 것에 대해 회개한다”고 하셨다. 나는 생각한다. 성경 66권 전체를 설교의 주제와 내용으로 했다면, 우리는 인생의 말년에 이런 것을 굳이 회개할 필요가 없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설교하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법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고 누가복음과 아모스서를 설교하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피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계시록을 설교하면, 종말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고, 역사서를 설교하면 개인을 넘어 교회, 민족, 역사 한복판에 임하는 하나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살피게 된다.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부드러운 음식과 딱딱한 음식, 고기와 채소, 프로틴과 아미노산을 골고루 먹여주는 마음으로 자기가 잘하는 설교, 인기 얻는 설교를 뛰어넘어 성도들에게 지금 필요하다 싶으면 성경 66권 전체를 매뉴얼로 다루겠다는 용기와 결단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말씀의 종'이다.

셋째, 이와 관련해서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다루는 설교가 좋은 설교이다. 흔히들, 신약은 약속의 성취요, 구약은 약속의 징조를 나타날 뿐이라 하여 구약을 경시한다. 이는 편향된 시각이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구약은 단순히 약속의 그림자(shadow)일 뿐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여 거듭난 성도들이 <거룩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는 보배라고 바르게 해석했다. 구약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이 들어 있다. 신약과 구약을 조화롭게 설교할 때, 성도들의 신앙에도 균형과 조화가 잡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이를 균형 잡아 골고루 다뤄주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 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성경과 관련해서 설교가 향해야 하는 방향을 제자 디모데에게 정곡을 찔러 말씀하셨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5-16).

결론적으로 말하면, 강해설교를 한다고 하여 성경적인 설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주제설교를 한다 하여 비성경적 설교라 할 수도 없다. 진정 성경적인가는 그 주제가 주님이신 예수님 - 특히 그 분 전체 - 에 잇닿아 있고 성경전체의 주제를 다루려 하며 신약과 구약에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면 성경적 설교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사실들은 설교자들이 귀담아 들을 내용이지만 성도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내 말씀묵상에 가만히 적용해 보면, 성경적 설교에 대한 조명은 곧 성도가 지금 <성경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한지를 비추는 반면교사가 아닐까?
소천하신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이 성경적 설교를 하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 분의 <레위기 강해> 서두를 보면 이 책이 하도 자신이 없어 강해를 피해가려고 하셨다고 고백하셨다. 그런데, 레위기에도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여겨 자기 약점을 하나님께서 보충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레위기를 설교했는데,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많은 영감과 은총을 부음 받았다고 회고하셨다. 성도들에게도 큰 은혜가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적 설교를 추구하는 마음이 설교자 자신과 회중에게 어떤 복을 가져다주는지 좋은 본보기인 것이다.

설교자는 성경적으로 설교하고, 청중은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진리와 은혜를 자기 삶을 살찌게 하는 기준으로 세우는 소위 ‘성경적 신앙’이 우리 각인들 안에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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