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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교회와 근본주의 신앙 (1)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2-10-02 오전 11:37:49
조회 841

한국교회와 근본주의 신앙 (1)

들어가는 말
사회가 세속화되어 가면서 교회가 엄히 경계해야 하는 두 가지 큰 사조가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요,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 신앙이다. 전자가 세속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과학주의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무분별하게 신앙에 도입하여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는 반면에, 후자는 세속화라는 충격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와 신앙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세상과 분리시키고 결과적으로 선교를 후퇴시키는 잘못을 행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이슈를 등에 업고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교회의 정통 신앙을 훼손하고, 공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후퇴시키며, 분리주의적 전투적 성향으로 인해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약화시켜 선교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등의 폐해가 심각하다.

문제는 이 근본주의가 개신교 신앙의 핵심 사조라 할 수 있는 복음주의의 옷을 입고 있기에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좇으며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성도들 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근본주의 신앙에 젖어, 생명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의 삶을 본의 아니게 따라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이 근본주의는 반공주의나 반동성애 등 대중의 이목을 선점하는 이슈의 한복판에서 문화전쟁(cultural war)을 주도하면서,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어 가고 있다.1) 실로 이로 인한 폐해는 만만치 않다. 따라서 필자는 향후 몇 차례에 걸쳐 근본주의 신앙과 그 영성적 성향(spiritual formation)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바르고 온전하며 건강하고, 복음적이고 선교지향적인 신앙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근본주의 신앙의 가치
근본주의는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이 세속화 되고, 자유주의 신학이 범람하여 교회를 잠식하는데 위기를 느낀 데서 시작되었다. 원래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치를 지키자는 좋은 취지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반지성적인 사조와 극우 정치운동과 연결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여 다양한 변모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근본주의 신앙은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갖고 있다. 첫째,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한다.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하나님이 기록자에게 직접 받아 적게 하셔서 기록된 것이라 성경 66권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한 글자도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여기서 오류가 없다는 말은 진리성에 오류가 없다는 뜻이다. 이 진리성은 과학, 철학, 사회과학 등 모든 범주를 포괄한 것이라 믿는다. 둘째, 근본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거나 약화시켜 받아들이려 한다. 셋째, 십자가 사건이 가진 폭넓고 심원한 다측면적 구속사 이해를 부정하고 대속적 죽음만이 유일한 의미라 주장한다.2) 넷째, 종말론에서는 전천년설 세대주의를 주장한다. 천년왕국 전에 예수께서 재림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근본주의는 교리적으로 2천 년의 정통 기독교 신앙과 분리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기독교가 특정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개신교 신자들 중에도 마치 기독교가 1517년에 시작된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교수로 섬겼던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95개조의 반박문을 써붙인 날을 기독교의 원년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1,500년간 기독교는 죽어 있다가 1517년에 부활한 것처럼 인식한다. 또 어떤 이는 기독교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신조나 교리가 태어난 날을 기독교의 시작으로 간주 한다.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요, 섭리하고 구원하시는 구속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소치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시작된 이래, 교회의 역사는 지난 2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 부상과 침강, 부흥과 쇠락, 타락과 회복과 갱신을 반복해 왔지만, 기독교회는 지난 2천 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서서히 확장되어 왔다. 그렇기에 정통 기독교는 지난 2천 년간의 신앙의 유산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오늘의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소중하게 간직한다. 내가 속해 있는 교파나 교단과 다른 교리를 가졌다 할 지라도,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주님으로 믿는 한, 포용하고 비판적일지라도 대화하며 연대해 나간다. 구속사를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의 성경관
그런데 근본주의는 이 정통 신앙과 분리되어 있다. 무엇보다 성경관에 오류가 있다. 건강한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요, 잣대가 되는 성경은 근본주의가 말하듯이 한 글자 한 글자가 하나도 빠짐없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스스로 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 행 1:1에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저자 누가가 말한 ‘내가 먼저 쓴 글’은 당연히 누가복음을 말한다. 그는 누가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 적은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실제로는 받아 적은 것인데 이렇게 기록했다면, 그는 대필자에 불과한 사람이 자기가 썼다고 말하는 격이 된다. 역사가 누가는 복음서를 예수의 행적을 추적하여 자료를 모아 기록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당연히 성령의 영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기록이다. 하지만 동시에 축자영감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받아 적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정반대이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거나 한 글자도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성경의 진리성을 방어하기가 어려워진다. 성경에는 과학적, 역사적 사실로만 받아들일수 없는 대목들이 왕왕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서의 향유옥합을 부은 사건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여인이 옥합을 깨어 머리에 부었다고 서술한다. 반면에 누가는 발로 씻었다고 서술한다. 어떻게 한 사건에 대해 두 가지 증언이 있을 수 있는가? 과학적/실증적 진리로 판명하려고 하면 둘 중에 하나는 틀린 진술이다. 또한 잠언 6:6~8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동물학자에 의하면 개미는 인간을 제외하고는 벌과 함께 가장 조직화된 사회를 갖고 있다고 한다. 여왕개미, 일개미, 병정개미 등 온갖 조직을 갖고 있다. 이 잣대로 보면, 성경은 과학적으로 오류이다. 성경의 한 글자도 과학적으로 틀린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의 주장은, 현대에서 상식과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성경의 계시성을 방어하려다가 그 진리성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어 버린다.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데 선교적으로 치명적 주장을하는 것이다.
성경은 스스로 축자영감설이 아닌 유기적 영감설을 주장한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절대 오류가 없다는 말이다. 딤후 3:16~17절은 말씀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글자의 오류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학적/실증적 진리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신앙과 거룩한 행위로 살아감에 오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의 성경관은 이를 부정한다. 결과적으로 자기 확신에 입각해 성경의 진리를 옹호하려다가 오히려 성경을 진리로 변증하고 방어하는데 철저히 실패해 버리는 오류를 낳게 된다.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속화 시대의 한복판에서 교회와 성도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며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복음화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선교의 대사명을 위해, 교회는 항상 무엇을 목숨 걸고 지킬 것이며, 비판적 대화와 만남을 통해 무엇을 개방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져야할 거룩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 중심 신앙을 거부하는 공산주의나 반성서적 가치를 주장하는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를 다루는 교회의 태도는 대단히 전략적이고 또한 지혜로워야 한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는 선교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심원한 통찰과 함께 현실적 감각을 같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2) 십자가 사건은 다양한 구속적 의미를 갖고 있다. 대속적 죽음의 의미는 말할 것 없고, 원수로부터 건져낸 속량의 의미, 마귀로부터의 승리 의미, 사랑의 모본으로서의 의미, 인간의 상한 영혼의 치유와 회복의 의미 등 다양하다. 기독교 신학은 대략 10개 이상의 구속 이론(atonement theory)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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