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 교회 표어
모이기를 힘써, 생명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행 2:46-47)

담임목사

HOME 담임목사 새문안강단
  • 담임목사 소개
  • 설교
  • 성경묵상ㆍ강해설교
  • 특별설교
  • 새문안강단

새문안강단

제목 세상이 기다리는 기독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교회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2-09-04 오후 2:18:44
조회 829

세상이 기다리는 기독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교회

한국 교회의 모(母)교회로 불리는 새문안교회가 창립 135주년을 맞이했다. “새문안교회는 왜 세워졌으며,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은 새문안교회를 어떤 도구로 당신 나라를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실까?” 다시 물어볼 시점이다. 지금 세계 신학의 큰 흐름은 초대교회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고 있다. 원래 교회사에서 초대 교회에 대해서는 재세례파나 침례교같이 성경말씀을 좀 더 급진적(radical)으로 현실사회에 적용하려는 분파들이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오늘 날은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같은 개신교 분파들까지도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에 주목한다. 바로 선교적 이유 때문이다!

세속화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
세상은 지난 300년 동안 세속화의 길을 일관되게 걸어왔다. 계몽주의로부터 시작하여 근대화, 산업화를 거쳐 21세기에는 인터넷 혁명, 지식정보사회, AI시대라는 얼굴을 갖고 세속화는 지속되고 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세속화의 거대한 흐름에 크게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취해왔다. 첫째, 저항주의이다. 이 세속화의 흐름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 흐름을 할 수 있는 한 거부하고 저항하며 신앙의 근본가치를 지켜내려고 한 시도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세속화를 주도하는 세상에대해 혐오하거나 적대시하고, 배타적이고 심지어 공격적이게 되었다. 이 흐름은 악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내어, 교회로 데려와 예수를 믿게 하고, 천국소망을 보며 사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가르치게 되었다. 일컬어 근본주의 신앙이라고 한다. 최근 이 흐름은 미국에서 트럼프주의와 유럽의 극우주의와 연결되어서 특정한 정치이념이나 문화를 절대선으로 여기고, 이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여 화전쟁(cultural war)을 선포하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둘째, 순응주의이다. 세속화를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선(善)으로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려는 흐름이다. 이 흐름에서는 세속화를 권위적 봉건주의로부터의 해방과 계몽으로 인식한다. 그렇기에 이 세속화는 악이 아니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확장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교회가이 세속화를 신앙 안에서 승화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개인의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드는데 적극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정의, 평화, 인권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적극 부여안고 이를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이 주로 이를 표방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결국 이 두 흐름은 충분히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저항주의는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켜 이원론에 빠져, 세상과의 건강한 소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지형을 확장하는데 실패했다. 순응주의는 기독교의 보편가치인 사랑, 자유, 평화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큰 성과를 거뒀지만, 기독교 자신의 고유한 맛과 기질 즉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실상은 종교로 포장된 ‘좋은 사람(good man)’ 만드는 정도로 기독교의 가치를 평가절하시켜 버렸다. 기독교가 복음이 아니라 도덕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화의 거대한 흐름에 투항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비판적, 창조적 수용 과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지형을 확장해가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세상은 더 이상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데, 다양한 가치가 상호 공존하는 사회에서 교회가 취할 길은 과연 무엇인가? 
세상을 완전히 거부하거나 배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동화되지도 않으면서, 교회가 자기의 고유함을 지키고 독특함을 지켜내면서, 동시에 세상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가져오며, 궁극적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이 과연 가능한가?

초대교회에서 찾는 세속화의 해답
그 길이 바로 초대교회의 길이다. 미국의 목회자이면서 저술가 스캇 솔즈(Scott Sauls)라는 목사가 쓴 『세상이 기다리는 기독교』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세속화의 심장인 미국 뉴욕 출신인데 미국에서 가장 저항주의 기독교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테네시주의 수도인 네쉬빌에서 목회를 하면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된다. 기독교는 급속한 세속화 흐름에서 잊혀지거나 거부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은 사실 기독교이든 무엇이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그 무엇”을 여전히 찾고 있는데, 문제는 기독교가 그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들만 진리를 갖고 있는 양 엄청나게 교만하고 무례하여 스스로 세상이 교회를 외면하게 만들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역사회 현장에 참여하면서 솔즈 목사는 세상은 오늘도 교회의 진리를 절실히 듣기 원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세상이 듣기 원하는 진리는 공격적이지 않고 친절하며, 자기중심적이기보다 섬기려 하고, 호전적이기보다 평화롭고, 배타적이기보다 포용적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본래의 기독교요, 세상은 이 본래의 기독교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고통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듯, 세상도 자기 허물과 죄악 속에서 탄식하며 자신들을 구해줄 교회의 진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솔즈 목사는 이런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요, 본래의 교회라고 본 것이다. 옳은 통찰이다!

초대교회의 무대인 로마제국은 오늘날과 같이 다원적 사회(pluralistic society)였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고, 민족의 고유한 문화가치가 존중되는 사회였다. 기독교는 이 다원적 사회 속에 스며들어가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초대교회의 영성이 어떤 특성과 색채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다. 일례로 사도바울은 자신이 세운 에베소교회를 떠나면서 장로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에베소 도시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바울은 에베소라는 ‘작은 세상’ 즉 우상숭배와 신전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해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군림하지 않고 호소했다는 뜻이다. “내가 진리를 가졌으니 무지한 너희는 내게 배우라! 죄인 된 너희는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윽박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독교가 자기 정체성과 확신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되, 그 복음은 세상에 대해 무례하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고 포용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이 이 교회의 진리에 대해 매력을 느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교회의 진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 세상이 그때도, 오늘도 기다리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에큐메니컬 정신과 선교지향적 교회
사실 이런 기독교적 영성은 1,800여 년의 간극을 넘어, 새문안교회의 창시자인 언더우드 선교사에게서 그대로 구현된다. 그는 여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와는 결이 좀 달랐다. 장로교 목사이며 선교사의 정체성을 가졌지만, 이 교파적 정체성을 다른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선교에서 철저히 복음주의적이면서 에큐메니컬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1 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하지만 교회 안에 갇혀있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 학교, 병원이라는 삼위일체를 축으로 하여 구한말 개화기에 한국 백성을 깨우고 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려 했다. 한국 백성이 실제 목말라하고 기다리던 기독교의 모양으로 기독교를 육화(肉化)시키려 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가 평양에 반듯하게 세워져 있는데도 굳이 연희전문이라는 명실상부한 기독교 종합학교를 추진하게 다.2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인재를 키워 세상에 배출하여, 이들이 어둠 속에 있는 조선의 빛이 되게 하여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것이다. 바로 19~20세기 초의 ‘조선이 기다리던 기독교’의 풍모였다!

새문안교회는 이런 역사적 뿌리에서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새문안교회는 항상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 대한 복종과 세상이 찾는 기독교 사이의 선교적 긴장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교회라 믿었기 때문이다.

새문안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 세상이 기다리는 기독교, 세상이 찾는 매력적인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어머니같이 품이 넓고, 포용적이며,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선교지향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이 기다리는 교회, 하나님이 찾으시는 교회이다.

 



1 여기서 에큐메니컬하다는 말은 단순히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조직적 측면만이 아니라, 신학적 차이와 신앙관의 차이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추구하며, 서로 다른 신학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향해 서로 포용적 자세를 견지한다는 뜻이다. 
2 이로 인해 당시 마펫을 비롯해 평양에 선교부를 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일시적으로 오해와 따돌림을 받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