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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교회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2-02-09 오후 1:42:56
조회 797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교회

오직 복음으로!
교회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 20절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었느니라”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한 진리의 터전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진리는 곧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실 것이며, 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사 61:1, 눅 4:18~19). 이 진리는 나사렛 예수를 통해 실현되었고 사도들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이 사실을 증언했을 때 죄인이 거듭나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묶인 자가 해방되는 역사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가 왕이시요, 그가 통치자시요, 그가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선포되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 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good news)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증언과 증언에 기반한 사건(event) 위에 세워졌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예수께서 왕이시다!”는 복된 소식의 기반 위에 세워진 성령의 도구요, 사건입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으로 진행하며, 복음 안에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 복음은 뜻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은 충고가 아닙니다. 신앙의 안내 매뉴얼이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한 도덕적 권면도 아닙니다. 복음은 가슴이 터질 듯, 듣는 이를 기쁘게 만드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2천 년 전뿐 아니라 오늘날도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 하셨기에 내 인생도 부활하며, 그가 왕이시기에 그에 의해 다스림 받는 내 인생은 절대로 안전하고 평안하며, 그래서 하나님 자녀인 나는 은혜와 진리와 공의를 따라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가 왕이시기에 하나님 백성은 절대로 세상이 삼키지 않으며, 결국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나는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단순, 담백한 복음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교회를 새롭게!
교회를 새롭게 하는 힘은 복음 자체에 대한 충성과 육화(incarnation)에서 나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의 설교 70%가 도덕설교, 치유 설교 그리고 ‘how to’ 즉 신앙의 안내 매뉴얼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복음이 꿈틀꿈틀 살아 숨 쉬지 못합니다. 이렇게 복음이 약해진 틈을 원수는 노리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다양한 종류의 유사 복음의 씨를 성도의 마음밭에 뿌립니다. 마치 복음이 약해진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유대적 율법주의를 뿌려 교회를 약화시킨 것과 유사합니다. 율법주의, 전통주의, 도덕주의, 특정이념을 신봉하는 것이 곧 복음에 헌신하는 것이라 착각하게 하는 유사 복음주의가 이런 예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힘은 약해지며, 성도들 생명의 힘은 유실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적 율법주의를 그토록 배격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복음을 대체하려는 신앙사조는 결국 교회의 생명을 밑으로부터 잠식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직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예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교회의 모퉁잇돌이기 때문입니다(엡 2:20).
왕 되시고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오고 행해왔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 진정 교회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그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대명제인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일”(요 10:10)과 직접 관련이 없는 많은 것들은 정리하고, 오직 생명사역이 차고 넘치게 일어나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겠다는 각오를 할 때 교회는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이롭게!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교회를 두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신 백성의 공동체를 통해 복음을 듣고, 복음으로 훈련을 받고, 세상에 보내지기 위한 제자공동체를 형성코자 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교회를 시작으로 온 세계에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초점은 교회(에클레시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의 초점도 하나님 나라입니다(행 19:8, 행 28:31).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발점이요, 모판입니다. 교회 자체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 백성으로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이뤄지게 하셔서, 세상 전체를 회복시키는 원대한 비전속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교회와 성도는 이미 부르심의 시작부터 사적(private)이지 않고 공적(public)이며 따라서 교회는 공적기관입니다. 교회를 보편적 교회(universal church)라 말함은 교회의 공적성격이 정점에 이르러 그것이 어떤 편당(偏黨)이나 사적 성격도 갖지 않은 보편성을 가졌음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세상과 분리하려는 것은 교회의 본질상 맞지 않습니다. 일각에서 요즘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가 왜 세상의 판단과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가? 교회는 교회 자신의 길이 있다!” 대단히 기개 있는 말이나 위험한 발상입니다. 교회를 스스로 세상에서 고립시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에 보내지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종교적 필요에 따라서만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자고 한다면 세상이 교회를 신뢰하겠습니까? 교회가 공공성을 갖는다는 말은 세상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곧 교회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아픔과 세상의 아픔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와 성도는 세상적인 것은 거부하되, 세상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어야 합니다.혐오하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호전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평화로워야 합니다. 승리주의나 정복주의의 태도를 가지면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인데, 교회가 세상에 베푸는 사랑을 어떤 것을 얻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포용성, 긍휼, 평화, 환대, 사랑은 곧 예수님의 현존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온유한 자가 될 것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마음으로 성도는 세상에 보내져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도 한 사람한 사람이 하나님의 대사로서 세상에 파송되어 가정, 학교, 직장 등 삶의 모든 터전으로 들어가 그 파송된 세상에 영향을 주고 도전을 주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도들을 교회에 붙잡아 매두려고 합니다. 교회를 잘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이를 일컬어 ‘교회주의 신앙’이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교회주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신앙을 갖고 세상으로 파송되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 세상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세상이 하나님 백성으로 인해 유익을 얻게 됩니다.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2022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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