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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독교는 ‘무례한 종교’가 아닙니다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1-12-05 오전 9:39:40
조회 761

미국 서부의 풀러(Fuller) 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유명한 조직신학자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는 기독교 신앙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한 권 냈었습니다. 『Uncommon Decency』라는 책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범한 품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한 가운데서 갖고 살아야 하는 품성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비범한 품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좀 역설적 의미로 ‘무례한 기독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 있는 마우(Mouw)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세계는 그리스도인이 원하든 불편해하든 이미 다원적(多元的) 세계가 되어 있다고 봅니다. 다원적이라는 말은 의미 그대로 진리의 근원은 유일무이하지 않고 다양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가치, 신념, 사상들이 사회라는 공적세계(public world) 안에서 경쟁, 경합, 각축을 하고 심지어는 투쟁하면서 자신의 진리성을 주장하며, 주도권을 장악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이지만 그 안에서 갈등과 분열이 증폭되고, 심지어는 이 갈등이 다른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폭력으로까지 확대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심각한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대 사회가 처한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등을 해소시켜 주고 화해와 평화를 가져다주어야 하는 미국 교회가 오히려 더 분열을 부채질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소리가 강한 곳에 긴장이 확대되고, 사람들 사이에 증오심이 팽배하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원적 세계 속에서 어딘가 기독교 리더쉽이 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저자는 느낀 것입니다. 마우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 전체는 아니지만일부 교회나 지도자들의 세계관이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지난 20~30년간 미국 교회의 선교적 역량은 심각하게 후퇴하게 되었고, 교회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정말 기독교적 가치와 신념을 확고히 가지면서, 비범한 품성과 품격을 갖고 세상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그는 사도들의 권면과 신약성경 시대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통해 이 삶의 가능성을 드러내고,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범한 품격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분열과 갈등이 떠나지 않는 한국 사회 내에서 교회의 대사회적 사명과 책임을 고려하면, 깊이 귀 기울여 들을 대목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도 세상과 사회를 적대시하고, 세상을 그저 십자가의 복음으로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세계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고, 정복과 교화(敎化)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을 일컬어 ‘정복주의적 세계관’이라 합니다. 중세의 교회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 때 견지했었던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관은 복음을 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미움, 분노, 적개심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전쟁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전투적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움의 영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런 신앙관을 갖고 있으면 교회는 절대 선이요, 세상은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품게 됩니다. 모든 사물을 선악 기준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가 이런 세계관으로 “세상은 교회의 밥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정복하자!”는 메시지를 선포할 때, 이를 듣는 회중은 속이 후련하고 세상에서 눌렸던 답답함이 해소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뒤에 성도들이 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생깁니다. 자연히 세상에 사는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나 온유함은 없어지고, 상대방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펴려는 ‘무례한 집단’이나 ‘편협한 그룹’으로 기독교가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한 양면적(duplicate) 인식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세상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서 변화되어야 하는 선교의 영역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깨달은 진리를 아직 전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가야 하는 대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공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에 들어오지 않은 세상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집 나간 둘째 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요 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요 3:17).

이 세상의 양면성을 인식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타자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면 안됩니다. 나는 진리의 소유자요, 타자는 미몽에 빠진 무지한 자처럼 인식하면 안 됩니다. 이는 요나가 니느웨에 가졌던 이분법적 세계관이요 선교를 가로막는 마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적대시 말고 온유함과 겸손함과 친절한 품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했습니다 (롬 12:18-21). 그리스도인이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어떤 성품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대목입니다. 마우 교수는 이를 책 제목에서 언급한 바처럼 ‘비범한 품격’이라 했습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받아내지 않으며, 증오를 증오로 되갚지 않으며, 칼을 오히려 온유함으로 받아내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자가 아니라 양(洋)의 영성으로 세상에 나가도록 파송 받습니다(눅10:3). 양으로 살아도 세상을 넉넉히 이기기 때문입니다(요 16:33). 셋째, 교회는 세상이 교회에 하는 말을 가볍게 들으면 안 됩니다. 그 중에는 일방적으로 교회를 폄하하거나 복음을 왜곡해서 하는 말도 분명히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눈에 비친 교회의 모습을 꼬집어서 말하는 것들 중,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교회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것들 또한 많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변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도대체 세상이 뭐라고 교회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냐? 교회가 언제 세상의 눈치를 보고, 세상의 지시를 받고 살았다는 말이냐?” 사사로운 마음 없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순수함과 기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교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후퇴시키며,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고립시키는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하늘의 높고 높은 보좌를 박차고 이 땅에 내려오신 때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을 적개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거나,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오신 날을 기다리며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오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갈라지고, 다투고 싸우는 이 땅에 평화를 심고 화해를 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소서. 이를 위해 얼어붙은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먼저 따뜻해지게 하소서. 임마누엘 우리 주님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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